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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따라 발길따라...

향적산(계룡산 남부능선)2010년 12월 12일

 

 

 

*향적산 등산코스*

 

*엄사리(10:00) - 맨재(11:26) - 누룩바위(11:35) - 향적산(11:50) - 상여바위(11:58)

- 대명리갈림길(12:34) - 대명리 회원별장(13:07)

 

*산행시간 약 3시간)

 

향적산 등산지도

 

 

 

 

 

 

 

 

 

 

 

 

 

 

 

 

 

맨재에서 바라본 계룡산 천황봉과 북부 주능선

 

조선조 영조때 신경준(申景濬)이 편찬한 '산경표(山經表)'에는

우리나라 산줄기를 백두대간(白頭大幹)과 장백정간(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으로 분류했는데

각 산줄기는 수계(水系)와 연계하여 정리돼있고 산과 봉(峰), 령(嶺)이 기록되어 있다.

백두대간에서 뻗어져 나온 13개 정맥가온데 충청지역을 지나는 산줄기는 금남정맥과 금북정맥이 있으며

금남정맥은 충청인의 젖줄인 금강 남서쪽을 지나고

전주 마이산에서 시작하여 대둔산(878m)을 지나 계룡산에 거쳐 서쪽으로 망월산을 지나 부여 부소산 조룡대에서 끝나는

총길이 129km로 정맥가온데 두번째로 짧다.

 

내가 대전에 살면서도 계룡산의 주능선은 오르지 못했으니

산을 좋아하는 산객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갑사에서 삼불봉을 거쳐 남매탑을 지나 동학사로 이어지는 산행과,

장군봉에서 남매탑을 지나 동학사로 내려오는 코스,

동원예비군에 소집되어  대간첩작전 훈련때 조치원 모부대에서

군용헬기를 타고 천황봉에서 내려 동학사로 향하는 수색작전에 참여했던 기억...

그리고 연산향교에서 상여바위를 지나 향적산에 올라 엄사리로 내려오는 남부능선코스는 몇 차례 올랐었다.

올해는 기필고 계룡산의 주봉에 올라

가슴속에 남아 있는 아쉬운 짐을 덜어보려 했는데...

올해도 뜻을 이루기가 어렵지 않나 싶다.

 

맨제에 올라 계룡산의 주능산을 바라보니 마음이 짠하다.

 

맨재에서 바라본 논산군 상월면 대명리 일대와

대한불교 천태종에서 운영하는 금강대학교

 

맨재에 오르니 동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세차 바위에 서있기 조차 힘들다.

산객은 오늘 선물받은 털모자를 쓰고, 서둘러 발길을 옮긴다.

 

 

 

 

 

누룩바위

 

 

 

헬기장

 

 

 

 

 

 

 

 

향적산 정상 표지석

 

향적산 천지창운비와 오행비

 

 

 

계룡산 남부능선

 

올해 3월 박회장님과 이부회장님 아바님과 넷이서

연산향교에서 향적산을 거처 엄사리로 내려오는 번개산행을 했었다.

그날은 날씨가 맑아 조망이 좋았었는데...

오늘은 구름이 끼어 햇빛이 없어 멀리 대둔산까지 보이지만

사진찍기 좋은 날은 아니다.

 

논산군 상월면 대우리일원

 

향적산에서 바라본 계룡산 남부능선과 대둔산

 

 

천지창운비

 

천지창운비는 시멘트로 만든 사각기둥의 비로

동쪽엔 천계황지(天鷄黃地), 서쪽엔 불(佛), 남쪽엔 남두육성(南斗六星), 북쪽엔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천지창운비와 나란히 오행비가 있는데

동쪽엔 五, 서쪽엔 火, 남쪽에는 聚, 북쪽엔 一, 이라고 음각되어있으며

오행비를 바치고 있는 주춧돌에도 원.형.이. 정(元.亨.利.貞)이 새겨져 있는데

정확한 의미는 알려진바 없다.

 

향적산은 무속인들이 향을 피워 쌓인 산이라고 한다.

 

계룡산 남부능선

 

향적산에서 바라본  엄사지구

 

 

 

 

 

상여바위

 

 

논산군 엄사면 도곡리와 계룡시

 

 

 

 

 

 

 

 

 

 

 

 

 

 

호조참판 박동민과 그의 아들 휘, 그리고 손자 박세기, 박세구를 모신 재실 永思齋

 

호조참판 박동민의 처 정부인 전주이씨 정려

 

임진왜란으로 한양에서 이곳으로 피난을 왔다가

남편 박동민이 장티푸스에 걸려 죽자 아내 전주이씨가 자결하여

조정에서 열녀문을 내렸다고 한다.

 

 

증호조참판 박동민 신도비(우)와 그의 손자인 증좌승지 박세기 신도비(좌)

 

 

호조참판 박동민 신도비

 

증좌승지 박세기 신도비

 

박세기는 신독재,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출세에 관심이 없어 향리에 머물며

당대의 대학자 명재 윤증과 교유하였다.

1646년 호서지방에서 유탁, 권대용등이 반란을 일으키려함에 충청관찰사인 임담에게 고변하여

난을 평정케한 공로로 원종공신에 올랐으며

훗날 좌승지에 추증되어 후손들이 1920년 신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박승태가 찬(撰 : 글을 짓고))하고 김문제가 서(書 : 글씨를 쓰다)했다.

 

박세기는 당대의 학자 서계 박세당과는 6촌간이며,

현석 박세채와는 8촌간이다.

 

신도비는 임금이나 종이품이상의 벼슬아치들이 묘지 앞에 혹은 큰길가에세우는 비석으로

평생의 행적을 기록한다.

 

마을 당산나무아래 우물가에서 마을아낙들이

김장을 하기 위해 배추를 절이고 있다.

 

김장준비를 하시는 반남박씨 며느리들...

 

추운날씨에 김장하시느라 추워 보이는 아낙에게

국화주한잔을 건네니 흔쾌히 드시면서

내일 김장을 하니까 마을회관으로 놀러 오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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