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동쪽 출입구
경복궁과 북악산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으로 1395년 태조 4년 경복궁 창건당시에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소실되었다가 1865년 고종 2년 경복궁 중건 당시에 다시 지어졌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어 건춘문 쪽으로 옮겨졌는데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었고 1968년 박정희 정부에서 복원하였으나 조선총독부 건물의 방향과 맞춰 재건되었다. 그 후 광화문 제모습 찾기 사업일환으로 일제 강점기 때 남산의 조선신궁을 향해 있던 광화문을 2006년부터 2010년 8월 15일까지 3년 8개월의 복원공사 끝에 경복궁의 근정전, 흥례문과 일직선으로 지어져 현재의 모습을 찾았다. 광화문의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편액대신 1865년 중건 당시 광화문 현판을 썼던 훈련대장 임태영장군의 서체를 복원한 것이다.
흥례문
흥례문은 경복궁창건 당시에 지어졌으나 세종 8년에 집현전에 이름을 짓게하여 홍례문(弘禮門)으로 불리게 되었고 고종 때 재건하면서 흥례문으로 불리게 되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철거되어 해방이후 중앙청,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1995년 광복절 기념으로 옛 조선총독부건물은 철거되었고 흥례문 복원계획에 따라 1996년부터 복원을 추진하여 2001년 흥례문과 주변행각 등을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전도에 맞춰 건립되었다.
흥례문 현판은 2001년 10월 서예가 정도준 선생이 쓴 것이다.
경복궁 흥례문 행각
금천과 영제교 禁川과 永濟橋
홍례문을 지나 근정문으로 가다보면 금천(禁川) 위를 가로지르는 영제교를 만난다. 영제교는 태종 11년 1411년 왕의 명을 받은 공조판서 박자청이 북악산 골짜기의 물을 끌어들여 궁궐에 금천을 만들었고 그 위에 다리를 놓아 금천교라 불렀는데 세종8년 1426년 영제교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영제교 돌난간 앞뒤에는 청룡이 있고 금천 사이 석축에 4마리의 천록(天鹿)이라는 동물이 조각되어 있다. 천록은 선한 짐승으로 왕의 은혜가 아래로 두루 미치면 나타난다는 전설상의 동물 서수(瑞獸)인데 서수인 천록이 임금의 은혜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는지 늘 지켜보았다.
금천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하고 이곳에서 부터 임금이 사는 궁궐이니 신하들은 금천을 건널 때에는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의미이다. 금천을 흐르는 물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수의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백악산에서 발원하여 경회루 서쪽으로 흘러 영추문을 조금 지난 지점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영제교를 통과한 다음 중학천으로 흘러 간다.
근정문 勤政門
근정전의 정문으로 3문으로 되어있는데 가온데는 왕이 출입하는 문이고 동쪽의 日華門은 문관이 출입하고 서쪽의 月華門은 무관이 출입하는 문이다. 일화문과 월화문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좌우행각 앞쪽에 설치되었었으나 고종 경복궁 중건 때 현재의 모습으로 지어졌다.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근정문에서 왕위 즉위식등 중요행사가 치뤄졌으며 왕이 승하하면 왕세자는 근정문에서 즉위식을 한 뒤 근정전 옥좌에 앉았다. 근정문에서 즉위하여 옥좌오른 국왕은 단종, 성종, 선조가 있다.
현재의 모습은 1867년 고종4년에 지어졌으며 근정문 현판은 경복궁 중건당시 도승지 이흥민이 썼고 근정문 주변 행각과 더불어 보물 812호로 지정되었다. 문관이 드나들었던 일화문
근정문 월대(月臺)
월대란 궁전앞에 있는 돌계단으로 중앙에 왕을 상징하는 봉황을 조각하였고 작은 계단에는 덩쿨문양(唐草紋 당초문)을 넣었다. 월대에 봉황과 당초문을 넣은 의미는 국왕이 백성과 화합하여 안정된 국정을 운영하려는 왕도정치의 조화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근정문에서 바라본 근정전
근정전 박석
화강암을 거칠게 다듬어 깔아 해빛이 강한 날에는 눈부심을 막고 가죽신을 신은 문무백관이 걸을 때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였고 비가 오는 날에는 빗물이 박석 사이사이로 천천히 흐르게 하여 빗물이 한꺼번에 몰리는 현상을 막아주었다.
근정전 품계석
근정문에서 근정전에 이르는 중앙 어도(御道) 좌우에 12쌍 24개의 품계석이 있는데 이는 관직의 품계에 따라 좌우로 문무관이 도열하는 위치표시석이다.
근정전 勤政殿
경복궁을 대표하는 전각으로 法殿, 正殿이다. 태조 2년 1394년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없어졌던 것을 고종 4년 1867년 재건하였다. 근정전의 이름은 정도전이 태조에게 지어 올린 것으로 '임금의 부지런한 자세가 정치의 으뜸'이라는 의미이다.
근정전에서 신하들의 조회를 하거나 왕위즉의식, 외국사진 접견 등 중요행사를 하던 곳이다. 궁궐 법전 가온데 유일하게 상월대(上月臺)와 하월대를 놓고 둘레에 돌짐승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는 경복궁에서 근정전이 법전(法殿)으로써 갖는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근정전의 현판은 경복궁 재건당시의 도승지 이흥민이 썼고 상월대와 하월대 난간에는 12지신과 상서로운 동물을 곳곳에 조각해 놓았으며 근정전 내부에는 일월오악도, 일월오봉병(日月五岳圖. 日月五峰屛))로 둘러 쌓인 어좌를 높은 대위에 놓아 왕실의 위엄이 돋보이도록 했다.
일월오악도 혹은 일월오봉병은 임금이 앉는 어좌 뒤에 설치된 병풍으로 조선왕권의 상징이며, 우주의 이치를 가장 극적으로 도식화하여 표현한 산수도(山水圖)로써 임금의 정사(政事)를 지켜보았다. 오악도(오봉병)에는 천지를 나타내는 해와 달이 있고, 오행의 상징인 火 水 木 金 土의 의미인 다섯 산봉우리와 물이 있으며 양 옆에 붉은 소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임금이 어좌에 앉으면 천, 지, 인, 곧 우주를 이루는 삼재의 조화가 완성된다고 보고 있으며 왕은 모든 이들 중의 으뜸으로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보았다.
주역과 노자에서 네가지 법상(위대한 근본의 상)으로 천지와 四時), 해와 달, 그리고 땅위에 성인, 즉 왕을 일컫는다. 왕은 하늘이 창조하는 신물(神物)을 본뜨고 천지의 변화와 변형을 본뜨고, 하늘이 보여주는 길흉을 가늠하는 가장 숭고한 자로 정의한다.
일월오악도는 조선건국 후 경복궁이 완성되어 근정전에서 정사를 보기 시작할 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며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근정전 박석 차일고리
근정전에서 왕의 주관으로 행사를 할 때 차양의 끈을 고정하는 차일고리
근정전 상월대 하월대
근정전에서 바라본 근정문
일월오악도와 어좌
근정전 단청
사정문에서 바라본 근정전 뒷모습
사정문
근정전 뒷편 행각 중앙에 있는 문으로 3문으로 되어 있으며 왕이 근정전에서 신하들의 조례를 받으러 드나들던 문이다.
사정문에서 바라본 사정전 사정전 思政殿
광화문, 근정전과 일직선상에 있는 전각으로 왕이 공식적인 집무를 보던 편전으로 사용되었고 문신들과 경전을 강론 하거나, 종친들이나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기도 한 곳이다.
思政殿은 태조 3년 1495년 정도전이 경복궁 창건당시 태조 이성계에게 지어 올린 이름으로 '임금이 깊게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백성을 굽어 살필 수 있는 마음가짐'을 뜻한다.
사정전에는 온돌이 없어 동쪽의 만춘전 서쪽의 천추전에 온돌을 깔고 사정전과 더불어 왕이 신하들과 일상적인 집무를 보았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고종 4년 경복궁 재건 떄 지어졌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마리의 용이 꿈틀대는 운룡도(雲龍圖)와 일월오악도 앞에 어좌가 있는 사정전 내부 모습
천추전
경회루 慶會樓
경복궁 창건 때 작은 누각으로 지어졌던 것을 태종 12년 1412년 큰 누각을 짓고 하륜에게 명하여 이름을 경회루라고 했다.
조선시대 명신 하륜이 지어 올린 글에 의하면 경회의 의미는 '올바른 정사를 펴는 임금은 올바른 사람을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올바른 사람을 얻어야만 경회라고 할 수 있다' 며 이는 곧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 서로 만나는 것을 말한다' 라고 적고 있다.
태종은 이곳을 사신의 접대 등의 목적으로 지었는데 과거시험이나 공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기도 했고 가뭄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성종 때 퇴락한 경회루를 화려한 모습으로 개축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완전 소실되었고 고종 4년 재건되었으며 일제 강점기 때 주변 담장이 헐린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회루의 현판은 창건당시에 양령대군이 썼으나 지금의 현판은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던 신헌이 썼다.
경회루는 국보 224호로 지정되었다.
수정전 修政殿
수정전은 경회루 남쪽에 있는 전각으로 국왕이 일상적으로 기거 했던 곳으로 집무를 보는 편전으로 쓰였던 건물인데 세종28년 1446년 이곳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이 창제되기도 했다 세조 때는 예문관으로 쓰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경복궁을 재건한 뒤 군국기무소 및 내각의 청사로 쓰이기도 했다.
현재 수정전은 전각과 월대만 남아있지만 경복궁 중건당시에는 행각이 둘러져 있었고 천추전과 행각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현판은 조선후기의 문신이며 도승지에 오른 조석언이 썼으며 보물 1760호로 지정되었다.
수정전과 월대 향오문 嚮五門
사정전에서 국왕의 침전인 강령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강령전
향오문애서 바라본 강령전
강령전 康寧殿
왕의 침전으로 동쪽으로 연생전과 연길당이 있고, 경성전과 응지당이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강령전은 왕의 침전으로 사용하는 공간이었지만 왕의 일상적인 생활 및 업무를 보는 곳이기도 했다. 강령전에서 신하들에게 연회를 열기도 했으며 월대를 중심으로 가설무대를 설치하고 궁중가무를 관람하기도 했던 곳이다.
강령전은 태조 4년 경복궁 창건 때 지어졌으며, 강령전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어올린 것이다. 강령의 뜻은 '서경' 홍범구주의 오복(五福) 중에 강령에서 유래 했는데 늘 덕을 쌓고,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정사를 펼치면 오복을 누리는데 오복의 가온데가 강령이고 이는 오복을 모두 차지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강령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고종 2년에 재건되었으나 창덕궁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일제는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강령전을 헐어 없앴던 것을 1995년 12월 다시 세워졌다.
강령전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지붕으로 경복궁의 교태전. 창덕궁의 대조전, 창경궁의 통명전과 같이 왕과 왕비가 거쳐하는 전각에는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왕은 곧 용으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경성전 慶成殿
강령전 내부 모습
강령전 굴뚝
양의문 兩儀文
강령전에서 왕비등 궁중여인들의 생활공간인 교태전과 자경전으로 들어가는 문
교태전 交泰殿
왕비의 침전으로 중궁전으로 불리웠으며, 왕비가 내외명부를 총관장하며 업무를 보던 곳이다. 교태전은 주역에서 泰는 양을 상징하는 乾 아래 있고, 음을 상징하는 坤 위에 있어 하늘로 솟는 양과 땅으로 가라앉는 음의 교합으로 생성한다는 뜻이다. 이는 음과 양이 화홥하고 소통하는 가온데 왕조의 법통을 생산하고 이어주는 곳이 교태전이기 때문이다.
경복궁 창건당시 기록에 없으나 조선왕조실록에 세종 22년 1440년에 교태전이 세워져 강령전과 교태전이 복도로 이어졌었는데 임진왜란 떄 소실된 것을 경복궁 중건당시 고종 2년에 재건했으나 창덕궁이 불타 없어지면서 일제가 이를 재건한다면서 교태전을 헐어 창덕궁을 재건하는데 사용되었고 1995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교태전 십장생도
교태전 내부 모습
교태전의 어처구니
9개의 형상이 올려져 있는데 서유기에 등장하는 동물이며 잡상(雜像)이라고도 불리운다. 중국 황제가 있는 건물에는 11마리의 잡상이 있는데 경복궁에는 9마리가 올려져 있고 경회루에는 11마리의 잡상이 올려져 있다.
峨嵋山과 굴뚝
태종은 경회루를 지을 때 연못을 파면서 그 흙을 궁중 교태전 뒤에 동산을 만들고 아미산으로 불렀다. 아마산의 굴뚝은 교태전의 온돌을 데울 때 나오는 연기를 배출하는 곳으로 고종 2년 경복궁 재건 때 세워졌다.
굴뚝에 사군자와 십장생 부귀를 상징하는 무늬와 화마와 악귀를 물리치는 상서로운 동물 등의 문양을 넣었으며 굴뚝의 기능을 살리면서 각종 문양과 장식이 아름다워 궁중 후원의 조형물로 예술적인 작품으로 높이 평가 되고 있다.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자경전 慈慶殿
자경전은 경복궁의 동북쪽에 위치하는 왕실의 여자 어른들이 거쳐했던 구중궁궐로 고종2년 지어졌는데 고종 10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어졌으나 고종 13년에 다시 소실되었고 고종 25년 1888년에 재건되어 일제의 훼손을 피해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자경전에서 경복궁 재건 당시의 대왕대비인 신정왕후 조대비가 거쳐하며 조선 후기에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곳이다. 흥선대원군과 결탁하여 고종을 왕위에 올렸으며경복궁 중건을 허락하기도 했다.
慈慶이란 자친 慈親 즉 할머니나 어머니 등 왕실의 웃어른이 되는 분의 경사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이며 보물 제908호로 지정되었다. 자경전
자경전
경복궁 향원정 香遠亭
경복궁 후원에 네모난 연못을 파고 섬을 만들어 그곳에 2층정자를 지었는데 누각이 향원정이다. 향원정 남쪽으로 목재다리 취향교를 놓았는데 원래는 건청궁방향으로 놓여져있었다. 세조 2년 1456년에 경복궁 후원에 취로정 翠露亭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건물은 고종 4년~1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향원이란 태극도설을 지은 중국 송나라 주돈이의 애련설 愛蓮設 중 향원익청 香遠益淸(향기는 멀수록 맑다)에서 유래한다. 향원정은 2층 누각으로 1층은 온돌을 깔고 2층엔 마루를 깔았다. 향원정의 물은 향원정 북서쪽 열상진원에서 흘러나와 남쪽으로 빠져나가게 되어 있다.
경복궁 장고 醬庫
경복궁의 장독대
집옥재 集玉齋
고종 10년 1873년 건청궁과 함께 지어진 건물로 중국풍의 건물인데 고종28년부터 30년까지 을미사변 이후 아관파천 때까지 고종이 머물며 서재와 외국사신등의 접견장소로 사용되었다.
신무문 神武門
경복궁의 북문으로 경복궁의 담장 중앙에 위치하지 않고 서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으며, 북쪽은 방위로 볼 때 겨울에 해당하고 방위신 현무가 위치해 있고 천장에 현무가 그려져 있다. 현무문은 고종 2년 경복궁 중건 때 지어졌으며 한국전쟁 떄 일부 파손된 것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복궁 태원전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셨던 곳이었으나 나중에 빈전이나 혼전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빈전은 왕실에서 돌아가신 분이 있으면 관을 모셔두는 곳이고 혼전은 종묘에 모실 때까지 만 2년동안 위패를 모셨던 곳이다.
태원전 홍경문
태원전 경안문
건청궁
건청궁
건청궁 장안대
건청궁 옥대루
경복궁 향원정
국립민속박물관 앞에 있는 12지신상
국립민속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문인석
남근석과 여근석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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