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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따라 발길따라...

해남 두륜산 산행 2012.4.8

 

 

 

 

 

두륜산 산행지도

 

 

 

고깔제비꽃

 

남산제비꽃

 

 

숲개별꽃

 

남산제비꽃

 

 

 

 

 

 

오심재에서...

 

오심재에서 바라본 고계봉

 

 

 

 

 

 

 

 

 

 

 

 

 

 

 

 

 

 

 

 

 

 

 

 

 

 

 

 

 

 

 

 

 

 

 

 

 

노승봉(능허대)

 

 

 

 

노승봉에서 바라본 가련봉

 

 

 

 

 

 

 

 

 

 

가련봉에서 바라본 해남군 북일면 일대

 

 

 

가련봉에서 바라본 노승봉과 고계봉

 

 

 

가련봉에서 바라본 두륜산

 

 

 

 

 

 

 

 

 

만일재

 

두륜사

 

만일재

 

 

 

두륜봉

 

 

 

 

만일재에서...

 

 

 

 

 

 

만일암지 오층석탑

 

두륜산 천년수

 

 

 

 현호색

 

만일재에서 바라본 가련봉

 

 

 

 

 

 

 

 

 

 

 

 

 

 

 

 

 

두륜봉

 

 

 

 

 

 

 

 

 

 

 

 

 

진불암

 

 

진불암 요사체와 장독대

 

 

진불암 향적당 香寂堂

 

진불암 응진당 應眞堂

 

진불암 약수

 

 

일지암으로...

 

진불암에서 일지암으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없습니다.

일지암을 탐방하지 않고 내려가는 것은 마음이 허락하지 않아

등산지도를 살펴 보아도 방향을 알 수 없고, 일지암에서 불사(佛事)를 진행하시는 분들께 길을 물었으나 아시는 분이 없습니다.

회장님과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일지암 입구에 있는 등산 안내지도를 살펴보고

북미륵암 방향으로 길을 잡아 능선에 올라 대흥사 쪽으로 방향을 잡아 내려가니

우리가 찾던 일지암이 눈에 들어 옵니다.

 

일지암 대웅전

 

 

일지암 요사체

 

 

일지암 . 자우홍련사

 

자우홍련사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일지암 복원기(한국다인연합회)

 

초의선사 입적 후 일지암은 화재로 소실되어 방치 되었으나

한국다인연합회가 일지암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일지암 복원기를 담은 돌이 자우선방 앞 울타리에 외롭게 서있습니다.

일지암 복원기는 일지암과 자우홍련사의 사진을 여러각도로 담아보려고 하다가

축대아래에 있는 돌을 발견해 담았는데...

한국다인연합회의 복원기를 담은 돌이 홀대받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일지암 一枝庵(감암선생 편액)

 

일지암(一枝庵)은

중국 당나라 여구운이 국청사의 승려 도교에게 일러  詩僧 寒山의 작품을 모아 만든 책 寒山詩

"늘 생각하노니 뱁새도 외가지에서 몸을 안존하며 사노라(常念초료鳥安身在一枝)"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일지암의 유천약수 乳川藥水

 

 

 

자우홍련사 慈芋紅蓮社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난 초의선사는 속성은 장張이며 이름은 의순意恂입니다.

15세에 나주 남평에 있는 운흥사로 출가하여 19세 때 대흥사의 완호스님을 스승으로 구족계를 받았으며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해 오도자로 불리웠고

완도에 유배와있던 다산 정약용으로 부터 유학과 배웠으며

당대의 대문호인 김정희와 교류하며 학문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39세 때 대흥사 뒷편에 일지암을 지어 다선일체(茶禪一體)를 실천하며

동다송과 다신전을 저술하여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명맥이 끊긴 한국의 차문화를 격조있게 정립하신 분으로

다성茶聖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초의선사는 55세에 1840년 헌종으로 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종사(大覺登階普濟尊者草衣大宗師) 시호를 받았으며

1866년 고종3년 81세에 입적하였습니다.

 

 

 

자우홍련사 慈芋紅蓮社

 

자우홍련사는 초의선사가 40여년동안 독처지관(獨處止觀)하면서 다선일여 茶禪一如 정신을 주창하며

동다송과 다신전을 저술한 누마루입니다.

연못을 파고 단주석(短柱石)을 쌓아 기둥을 만든 독특한 형태의 한옥인데

여수에서 철거된 고가(古家)의 목재를 가져다 지었답니다.

 

慈芋紅蓮社의 의미는

땅속에서 자라는 토란과 물속에서 자라는 연꽃을 들어

세상의 이치를 표현한 것이라 하며...

.

추사 김정희는 자우홍련사를 줄여

자우산방(慈芋山房)으로 이름을 지어주었답니다.

 

 

일지암 차밭

 

 

 

표충사

 

 

 

서산대사의 속성은 최이며 이름은 여신으로 부모를 일찍여의고 안주목사 이사증의 양자로 들어가

12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무예와 학문을 익히고 15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지리산 청학동 화엄사동 칠불동을 떠돌다

노스님의 권유로 불교를 공부하다 뜻한 바 있어 머리를 깍고  1540년 일선화상의 스승으로 모시고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이후 승과에 합격하여 양종판사를 하였으나 곧 사임하고 산문으로 들어갔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이르렀을 때 선조의 요청으로 전국의 사찰로 격문을 보내

의승군의 궐기를 호소하였고 대사는 순안에서 1,500명의 승군을 조직하여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선조가 팔도십육종도총섭에 임명하자 74세의 고령임을 들어 제자 사명대사에게 맡기고 묘향산에 들어갔으며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오자 승군을 이끌고 호위한 뒤 승군장을 유정에게 물려준 뒤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선조는 대사에게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의 시호를 내리고

종2품 당상관에 임명하였고

대사가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할 때 발우와 금란가사를 대흥사에 보관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

서산대사 유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서산대사는 선교양종판사를 지내면서 선교 양종으로 분열되어 있던 불교계를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라고 갈파하며

선교양종을 통합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예제문 禮齊門

 

 

표충사 어서각

 

표충사는 서산대사가 입적한 후 185년이 지난 1788년(정조12년) 서산대사의 7세 법손인 계홍과 천묵이

조정에 상소를 올리니 선공감제조로 있던 호조판서 서유린이 정조대왕에게

"선묘가 내리신 전교와 의발이 호남 대둔사에 있으니 영남의 예(밀양표충사에 유정이 배향됨)에 따라 사당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시고

표충이란 편액을 내리는 것이 포장(褒獎 : 칭찬하여 장려하다)하는 뜻에 부합됩니다" 주청하니

정조대왕은 사당건립을 허락하고 '表忠祠'라 사액(賜額)을 내려

중앙에 휴정 좌측에 유정 우측에 처영뇌묵대사를 배향하였습니다.

 

 

표충사 편액은 정조대왕 친필글씨이며

어서각의 편액은 전라우수사로 와있던 신관호의 글씨입니다.

 

 

 

 

대흥사 표충사 조사전(祖師殿)

 

대흥사의 창건주 아도조사와 13명의 대종사를 비롯한 강사의 진영을 모신 곳입니다.

 

표충비각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

 

 

초의선사 동상

 

 

대흥사 성보박물관

 

 

가허루 駕虛樓(창암 이삼만)

 

가허루 현판은 조선 순조때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서예가인 창암 이삼만이 쓴 글씨인데

원교 이광사에게서 서예를 배웠다고 합니다.

 

 

대흥사 천불전

 

가허루 기둥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이 높아 문지방이 높아 질 수 밖에 없어

문지방의 나무를 둥글에 깍아 천불전을 참배하는 불자들의 불편함을 덜게 해주고 있습니다.

 

대흥사 천불전

 

천불전은 1811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813년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대사와 제성대사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천불전을 중건한 완호대사는 화순군에 있는 풍계대사에게 의뢰하여

경주 불석산(不石山)의 옥돌로 1000불을 조성하게 하였습니다.

10명의 석공이 6년여 동안 조성한 불상을

순조 13년 경주 장진포에서 3척의 배에 나눠 싣고 대흥사로 출발하였으나...

그 중 한척은 풍랑을 만나 일본으로 밀려갔다

돌아오는 바람에 순조18(1818) 8월 15일에 천불을 봉안하였답니다.

 

천불전

 

천불전 편액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입니다.

 

 

천불전 단청

 

 

 

대흥사 침계루

 

침계루(원교 이광사)

 

침계루(枕溪樓)는 계곡을 베게 삼은 누각이라는 뜻이며

대흥사 침계루는 두륜산에서 흘러내리는 계류옆에 있는 전각으로

대웅보전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대흥사 대웅보전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

 

조선시대 후기에 쌍벽을 이루는 서예가는 단연

동국진체를 완성환 원교 이광사와 추사체를 완성한 추사 김정희 입니다.

둘은 동시대에 살지는 않았지만

김정희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폄하했는데 하나의 일화를 보면...

 

김정희가 제주로 유배를 가면서 일지암의 초의선사에게 와서

"조송설(조맹부 : 원나라의 서예가)이 춤을 춥니다 그려...

촌스러운 대웅보전의 현판을 당장 떼어내세요. 내가 현판을 써줄테니..."

이광사의 글씨가 조맹부의 형식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혹평을 한 것입니다.

초의선사는 아무말 없이 현판을 내리고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 현판을 걸었답니다.

그 후 김정희는 8년간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대흥사 일지암에 들러 초의선사에게

"지난 번에 내린 원교의 현판이 있으면 다시 걸으세요"

추사 김정희는 제주에서 8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자아성찰을  통하여 더 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량수각(추사 김정희 글씨)

 

대흥사 대웅보전 좌측에 스님들이 머무는 요사체 백설당(白雪堂)이 있는데

그곳에는 2개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인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로 대웅전에 걸었던 것을 떼어낸 것을 백설당에 걸은 것이고

백설당은 성균관 대사성과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해사 김성근이 쓴 글씨입니다.

무량수각의 의미는 무량수불인 아미타여래를 모신 법당을 말하며

극락보전이라고도 합니다.

 

대흥사 청운당

 

 

 

 

 

 

대흥사에는 사천왕상이 없고

코끼리를 탄 문수보살과 보현동자가 문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천왕문에 사천왕상이 없는 이유는 대흥사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월출산이 있고 남으로는 달마산

동쪽으로는 장흥 천관산 서쪽으로는 선운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어 풍수지리상으로 완벽한 곳이라서

사천왕상이 지키고 있지 않아도 안전하답니다.

 

보현보살은 석가여래를 오른쪽에서 모시고 있는 보살이며 불교의 진리와 수행의 덕을 담당하는 보살이고

문수보살은 석가여래를 왼쪽에서 모시며 지혜를 담당하는 보살입니다.

보현보살과 석가여래와 문수보살을  삼존불이라고 합니다.

 

해탈문(원교 이광사 글씨). 두륜산 대흥사(해사 김성근 글씨)

 

제주도를 비롯한 남해안의 섬들은 조선시대 조정의 관리들이

역모와 사화 그리고 당쟁으로 인한 유배지가 되면서

그들이 머물렀던 지역에서 유배문화가 꽃을 피웠습니다.

기사환국으로 남해의 조도에 귀양온 서포 김만중은 유배지에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저술했고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전남 강진에 유배온 정약용은 유배 중에 경제유표와 목민심서를 저술하였습니다.

 

원교 이광사는 1755년(영조31년)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51살에 완도군 신지도에 유배와

그의 친구 황치곤의 집에서 살면서 동국진체를 완성하였습니다.

그의 글씨를 흠모하여 대흥사 편액과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의 편액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연려실기술을 저술한 이긍익이 원교 이광사의 장남이고

조선 후기에 호남을 대표하는 서예가 창암 이삼만은 그의 제자입니다.

원교는 유배생활을 헤어나지 못하고 1777년 8월 신지도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암행어사를 할 때 비인현감으로 있던 안동김문의 김우명을 파직한바 있는데

이는 그의 강직한 성품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로 인해 훗날 안동김씨의 표적이 됩니다.

1835년 풍양조씨가 집권하면서 김정희는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이조판서로 승승장구하다가

1840년(헌종6) 안동김씨가 집권하면서 윤상도의 옥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귀양을 갑니다.

 

그가 8년 3개월을 제주에 귀양가 있는 동안 추사체를 완성했고 세한도를 그렸습니다.

세한도는 그의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것으로

이상적은 시인이면서 금석학 서화에 조예가 깊었으며, 역관으로 청나라에 12번이나 드나들면서

제주에 유배와 있던 김정희에게 청에서 구해온 희귀도서를 전해주었는데

그에 대한 답례로 주었답니다.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김정희는 죄인 신분으로 그들과 허락없이 교류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

목이 달아나거나 집안이 망할 수 있는 일 있는데...

역관 이상적은 위험을 무릅쓰고 스승에 대한 우정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흥사 부도밭

 

 

대흥사 부도밭에는

서산대사와 초의선사를 비롯한 13명 대종사의 부도가 모셔져 있습니다.

 

 

 

 

 

유선관

 

유선관은 1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여관으로

1913년 처음부터 여관으로 쓰기 위해 한옥으로 지었으며

1960년 광주에서 장화라고 불리우는 기생 박미희가 운영하던 것을

2000년에 윤영재씨가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소유권은 대흥사에 있답니다.

 

유선관은 두륜산 도립공원내에 있는 시설로 공원내에서는 영업행위가 금지되어 있어

2003년부터 4차례에 걸쳐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고발당했다는데

운영자는 전통명맥을 잇겠다며 영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공중파 방송에서 1박2일을 방영한 뒤

많은 관광객이 해남을 방문하면서 해남군에서는 유선관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 깊어지고 있답니다.

유선관을 도립공원 자연환경보전지구에서 제외할 것인지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유선관이 대흥사 관내에 있어 문화재보호구역내에도 포함되어 있다네요.

해남군에서는 자연환경보전지구와 문화재 보호구역에서 해제가 불가능하다면

원 소유주인 대흥사에서 인수하여 탬플스테이등으로 활용하기를 바라는 눈치라고 합니다.

 

 

 

 

유선관 장독대

 

 

 

정원 가온데에 굴뚝이 세워져 있어 멋스러움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온돌을 보일러로 교체했다고 하네요.

 

대흥사천 쪽으로 마루를 놓고 탐방객에게

도토리묵과 해물파전 그리고 동동주를 판매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