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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따라 발길따라...

부처님 오신날 계룡산 암자 순례(2사 8암자) 2012.5.28

 
 
부처님 오신날 계룡산 2寺 8암자 순례
 
계룡산 암자 순례코스
 
관음암 - 길상암 - 미타암 - 동학사 - 남매탑 상원암 -  연천봉 등운암 -  보광원 - 금룡암 - 소림원 - 신원사
5시간 산행
 
 
지난 겨울 모 산악회에서 지리산 7암자 순례를 한다기에 따라나섰는데
눈이 많이 쌓여 산대장이 길을 잃는 바람에 7암자 순례를 하지 못하고 돌아온 일이 있어서
사월초파일에 다시 다녀올까 했더니만 아내가 극구 반대합니다.
이틀전에 덕유산 산행을 한 뒤라서 다시 지리산산행을 하면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입니다.
차선책으로 계룡산 암자 순례하기로 하고
휴대전화에 알람을 5시에 맞춰놓고 잠이 들었는데 새벽 4시30분에 아내가 맞춰놓은 자명종이 울어 댑니다.
아칩밥을 짓고 꽃단장을 하느라 아내는 바쁘고...ㅎ
허겁지겁 아침밥을 먹고 5시 30분에 집을 나서 지하철역으로 향합니다.
 
대전 현충원역 동학사, 갑사, 신원사 버스시간표
 
계룡산 국립공원 동학사 탐방지원센터
 
월평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현충원역에 내려 동학사 시내버스 107번에 올라 
동학사 입구에 도착하니 오전 6시 40분입니다.
이른 아침인데도 부처님오신날에 오실 탐방객들의 차량통제를 위한 리허설을 하는지
국립공원 탐방지원센터 직원들은 바삐움직이고 있습니다.
 
 
옅은 안개에 덥힌 계룡산의 새벽 바람은 시원합니다.
은초록으로 물든 숲에서는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산울림이 되어
계곡물과 함께 흐르고
간밤에 숲이 만든 맑은 공기를 들어마시고 다시 내뿜으며
산객은 바쁜걸음으로 산길을 오릅니다.
 
동학사 매표소
 
먹물 옷을 입은 보살님의 걸음이 무척 빠릅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예쁜모습으로 단장하시고 부처님을 뵙는 기쁨에
발걸음이 가벼워 보입니다.
 
계룡산동학사 일주문
 
계룡산동학사 일주문 글씨는 여초 김응현(1927~2007)님이 쓰신 글씨랍니다.
남매탑 상원암 현판도 쓰셨고,
청하(淸河)라는 술의 글씨로고도 여초선생이 쓰셨답니다.
 

첫 암자 문수암입니다.

 

신원사까지 12시까지 가기로 했기에

100m를 오르면 문수암에 갈수 있는데 그런 여유도 갖지 못하고 관음암으로 향합니다.

암자순례를 끝낸 뒤에 돌이켜 보니 후회가 됩니다.

신원사에 12시 전에 도착했으니까 시간은 충분히 있었는데

 그리고 왜 12시를 고집했는지 말입니다.

 

나에겐  100m의 여유로움이 없었을까요?

 

100m의 여유...

제가 저에게 묻는 물음입니다.

 

1.관음암
 
산사는 말끔하게 단장하고 법요식 준비를 끝내고 참배객을 맞을 준비를 하고...
마당에 연등이 걸리고
암자엔 스님의 염불소리가 조용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산사에 불어오는 바람에 연등이 이리저리 나부끼고
노보살님은 암자 한켠에 앉아 그 모습을 물끄럼이 바라보고 계십니다.
 
 
 관음암 현판과 주련도 여초선생 글씨입니다.
2. 길상암
 
 
암자 뜨락을 가득 채운 연등이 분홍은 분홍색에 맞춰 줄을 서고
초록은 초록색에 맞춰 줄에 매달려 나부끼도 있습니다.
길상암의 연등이 가장 화려해 보입니다.
 
 
 길상암
 
길상암 현판과 주련은 대전의 서예가 이자 추사체의 대가인
최정수(1918~1999)선생이 쓰신 글씨입니다.
그분의 아들이 대전에서 서실을 운영하고 있답니다.
 
3. 미타암
 
 
연등도 암자마다 모양과 색상이 다르네요.
미아탐의 연등은 청사초롱처럼 길다란 모습으로 줄에 매달려 있습니다.
암자를 찾은 참배객이 등보시를 하면 주소와 이름을 쓴 리본이
연등아래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미타암의 미타(彌陀)는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의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불법을 알린다는 부처님을 말한답니다.
 
미타암 관불(灌佛)
 
관불이란 부처의 몸에 향수나 감차(甘茶) 뿌리는 것으로
석가모니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부처님 오신날 불상에 감차를 끼얹는 것을 말합니다.
 
동학사
 
 
동학사 현판은 창암 이삼만 선생(1770~1847)의 글씨이며,
이삼만 선생은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의 제자입니다.
 
동학사 연등
 
동학사 경내에 매달린 연등과 아낙의 옷차림과 묘한 어울림이 있습니다.
 
연등(燃燈)은 등불을 밝힌다는 뜻이며, 부처님께 공양하는 방법의 하나로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등불을 켜는 것은
번뇌와 무지로 가득찬 어두운(無明)의 세계를 부처님의 지혜로 밝게 비추는 것을 상징한답니다.
어둠과 번뇌를 물리치고 영원한 진리의 광명을 밝혀
온 세상을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로 가득 채우자는 것이죠.
 
빈자일등(貧者一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여인 난타가 부처님께 정성껏 등공양했는데 목련존자가 밤을 새워 등을 지키다 날이 밝어오자
밤이오면 다시 켜려고 등을 끄기 시작했습니다.
목련존자에 의해 등이 모두 꺼졌어도 난타여인이 공양한 등은 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난한 여인이 부처님께 공양한 등은 불멸의 등불이었던 것입니다.
요즈음 등공양에도 등급이 있어 많은 돈을 내면 화려하고 멋진 모양의 등을 선택하여 일년동안 연등을 걸어주고,
적은 돈을 내면 연등을 하루만 밝혀준답니다.
 
 
수련
 
동학사 경내의 조그만 연못에 수련이 꽃대를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산사의 아침을 맞고 있고
하늘에서 나부끼는 연등이 연못을 거울 삼아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있습니다.
연등은 자신의 모습을 어떤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개연꽃
 
 
 동학사 연등
 
 동학사에서 관불을 하시는 보살님
 
동학사 관불식
 
 
 
 
 이른 아침이라서 산에 오르는 분들이 적어 여유로운 산행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산에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남매탑에 다다르니 벌써 산을 내려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남매탑
 
4. 상원암
 
 상원암 현판은 여초 김응현 선생의 글씨입니다.
 
상원암의 이른 아침은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참배객을 맞을 준비로 분주합니다.
 
공양간은 공양주보살님들이 음식만들기에 바쁘고
등공양을 하실 분을 위해 접수대에 앉아 참배객을 기다리고
스님은 준비가 부족한 곳이 없나 이곳 저곳을 살펴보시고
산객은 상원암의 약수를 마시며 암자의 이른 아침 풍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산사 뒤의 연초록 숲이 싱그러워 보입니다.
 
 
삼불봉 고개를 오르는데 숲에서 딱따구리가 아침공양을 하나봅니다.
또로로르..........
스님의 목탁소리처럼  산에 오르는 산객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삼불봉 고개에서 바라본 풍경
 
 
 
 
 
 
 
  함박꽃
 
 함박꽃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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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연천봉 등운암
 
등운암은 연천봉 아래에 있는 암자로 신라 문무왕 5년(665년) 등운거사가 창건한 암자로 신원사의 말사인데
현재 불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연천봉에는 방백마각(方百馬角) 구혹화생(口或禾生)이라는 석각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풀이하면 482년이 되면 조선이 망한다는 의미로 정감록은 씌여 있답니다. 
이런 정감록의 지적에 민심이 흉흉해지자
흥선대원군은 전국의 정감록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고, 계룡산에 사람의 출입과 거주하는 것을 금하였답니다.
이후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태조가 조선의 도읍을 정하기 위해 둘러보며 세웠던 계룡신사(鷄龍神祠)를 폐하고
천자오악봉선(天子五嶽封禪)에 따라 중악단을 세우고
신원사(神院寺)를 조선왕조 500년을 여기서 끝내고
새로운 제국의 신기원을 연다는 의미로 신원사(新元寺)로 개명하였답니다.
고종황제의 妃 명성황후도
등운암의 옛터에 암자를 세우고 압정사(壓鄭寺)를 세워 정씨의 왕기을 눌렀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과 고종황제 그리고 명성황후의 노력으로 정씨의 왕기를 눌렀는지 모르지만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왕조는 순종황제를 끝으로 나라마져 일본에 병합되는 치욕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등운암 부처님 오신날 봉축법요식
 
등운암에 오르며 남자산객에게 신원사 방향을 물으니 자신들이 올라온 길로 내려가라 하시며
제게 등운암의 법요식에 참여하자고 제안을 합니다.
오전 10시 06분 아내와 함께 그들을 따라 등운암 경내에 들어가니 봉축법요식이 엄수되고 있습니다.
위 사진은 보살님의 사회로 부처님께 등보시를 하는 광경입니다.
우리는 합장참배를 하고 등운암을 내려와 산객이 알려준 길을 따라 신원사로 향합니다.
 
 
 
 
 
 
 
 
 
 
6. 보광원
 
보광원
 
보광원에 도착하니 보광원은 법요식이 끝나고 스님을 선두로 참배객들이 석가모니불을 외면서
대웅전 내부를 돌고 있습니다.
대웅전 밖에서 합장참배를 하고 경내를 나오려니 보살님이 점심공양을 하고 가라고 부르십니다.
아내랑 신원사에서 점심공양을 하기로 약속이 있어서 금불암으로 향합니다.
 
7. 금룡암
 
금룡암 대웅전
 
금불암도 법요식이 끝나고 모두 점심공양을 하고 있길래 우리도 대웅전과 산운각을 참배하고 점심공양을 하려고
공양간에 가니 우리의 모습을 보시더니 공양주께서 한말씀 하십니다.
"밥맛 좋겠네요"
우리가 등산복차림이고 동학사에서 넘어왔다고 하니까 시장하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입니다.
금룡암 공양주께서 산채나물을 올린 비빔밥을 주시면서 
콩나물국 그리고 열무물김치 중에 어느것을 드실 거냐고 하기에 물김치를 받았습니다.
어머님이 생전에 초파일 절밥을 먹어야 복받는다고 하셨는데
금룡암의 점심공양은 복을 얹어서인지 짭짤하니 맛이 좋습니다.
 
 
 금룡암은 금룡동천의 성지가 있다고 합니다.
금룡동천 암자에는 불상도 없고 촛불만 타고 있고 암자 뒷편엔 금줄이 쳐져 있습니다.
 
 
 
8. 소림원
 
 
 소림원 삼성각
 
신원사 중악단
 
중악단은 산신을 모신 묘단으로 조선왕실에서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고 계룡단을 지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것을 효종(1615)때 미신라는 이름으로 철거되었으며,
그 후 개화기 때 명성황후가 고종과 아들 순종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국운의 상승을 서원하기 위해
묘향산의 상악단, 계룡산의 중악단, 지리산의 하악단을 지어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나
상악단과 하악단은 멸실되어 중악단만 유일하게 남아 있습니다.
 
중악단은 왕실에 의해 당시의 궁궐건축양식을 도입하여 지어져
그 역사적 배경과 건축기법등이 학술적으로 가치가 큰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 16일에 중악단에서
신원사주관으로 산신제가 열려 국태민안과 남북통일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중악단
중악단 현판은 조선 후기의 문신 이중하(1846~1917)님이 1891년에 쓴 글씨입니다.
본관이 전주인 이중하는 안변부사로 재직할 때 청이 간도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간도에 있는 농민들을 추방하자 토문감계사가 되어 청의 관리들과 협상하면서
그들이 군대로 위협하니 이중하는 "내머리는 잘라 갈 수 있으나 우리강역은 축소할 수 없다"고 반발하였다고 합니다.
 
 
 노랑어리연꽃
 
 노랑어리연꽃
 
신원사 영원전
 
신원사 대웅전
 
신원사 연등
 
신원사 대웅전에서 참배를 하고 등보시를 하고 나니 시간이 정오를 지나고 있습니다.
당초 아내랑 신원사에서 점심공양을 하기로 했는데
금룡암에서 이미 점심을 먹은 뒤라서 어찌할까 고민이 됩니다.
점심공양을 위해 참배객들이 길게 줄을 서있는 상태라서 한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차례가 돌아올 듯합니다.
아내에게 의견을 물으니 조금만 먹고가자고 하여
정오의 햇빛을 받으며 긴 줄을 따라간 뒤에 매솔당에서 점심공양을 하는데
이곳에서도 산채비빔밥에 열무물김치입니다.
 
오래전 어머님이 살아계실 때...
사월 초파일에 신원사에서 어머님과 법요식을 참관하고 점심공양을 하고 간 적이 있어 그날을 회상해 봅니다.
오늘은 이래저래 밥복이 넘쳐나는 하루가 된 듯합니다. 
 
정오를 지나고 있는데 신원사 뜨락의 연등을 거는 줄엔 비어 있는 공간이 많습니다. 
점심공양을 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며 앞에 있는 아낙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니
참배객들의 등공양이 예전만 못하다고 합니다.
작년만 하더라도 신원사 앞 마당을 가득채우고 매솔당 앞마당까지 내려왔다는데
올해는 신원사 앞마당도 채우기 어려울 듯 하네요.
등공양이 저조한 이유를 아낙이 나름 진단하고 계셨는데
사람살기가 예전만 못해 그렇다는데 제가 보기에도 그리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께 올리는 등공양도 주머니가 얇으니 망설이지 않을 수 없겠지요.
 
신원사 부처님 오신날 등접수
 
신원사 매솔당에서 참배객 점심공양
 
신원사 공양간
 
신원사 사천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