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전
대웅전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규모로 되어 모두 15칸 건물이며,
특이한 것은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평면형이라 건물내부의 기둥배치가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이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중건하였지만 건물의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며,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아 통도사 대웅전은 참배의 기능만을 갖고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상을 모시지 않은 대신 불단 뒤편으로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금강계단이 위치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불당 내부에는 동서방향으로 길게 불단만이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設法床)이 있어 대덕승려가 설법할 때 사용한다.
통도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불전건물이다.
현재 국가 지정 국보 제290호로 보호받고 있다.
이 법당은 통도사의 중심건물로서 상로전의 주건물(主建物)이다.
대웅전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규모로 되어 모두 15칸 건물인데
특이한 것은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평면행이라 건물내부의 기둥배치가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이다.
전면 쪽에는 동향한 3칸 방향 평면의 건물이 있고 뒤쪽에는 남향의 3칸, 2칸 정방형 평면의 건물이 전면 쪽 건물에 붙어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기둥의 배치에서 곧바로 알 수 있으며 지붕모양을 보고서도 알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중건하였지만 건물의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기단의 형식을 보면 지대석(地代石), 면석(面石), 갑석(甲石) 등을 조립한 가구식(架構式) 기단이며
석계(石階)의 배치는 원래부터 현존의 건물과 같은 평면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계단의 위치를 보아도 평면이 합성(合成)형식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불당은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이 불당은 배전(拜殿)의 기능만을 갖고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불상을 모시지 않은 대신 불당 앞에 진신사리를 모셨다.
불당 내부에는 불쪽에 동서방향으로 길게 불단만이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設法床)이 있어 대덕승려가 설법할 때 사용한다.
건물 구조형식을 보면 공포는 다포식으로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칠포작(七包作)이다.
외부는 모두 쇠서 모양으로 되고 내부는 교두(翹頭)모양으로 되었다.
가구는 일고주(一高柱) 구량가(九樑架) 형식으로 하여 대량, 중종량, 종량이 지붕구조를 받도록 되었다.
천정(天井)은 우물천정인데 층급(層級)을 두어 중심부를 가장 높게 차지하였고 내부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통도사 홈피에서 옮김)
영축총림 통도사는 646년(신라 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
통도사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정골(頂骨)과 지절(指節), 치아사리(齒牙舍利), 금란가사(金?袈裟)가 봉안되어 있어
불지종가(佛之宗家)이자 국내에서 가장 큰 가람으로서 국지대찰(國之大刹)의 사격(寺格)을 지닌 사찰이라 할 수 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에 보면
원래 통도사가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아름다운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을 메운 후 그곳에 금강계단을 쌓고 통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스님이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佛舍利), 금란가사,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고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가람은 자장율사가 쌓은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몇 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고려시대인 1085년(고려 선종 2) 통도사의 경내임을 나타낸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세울 만큼 사세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1235년(고종 22)에 상장군(上將軍) 김리생(金利生)과 시랑(侍郞) 유석(庾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하던 차에 절에 와서 계단의 석종을 들어내고 석함 속의 사리를 예경했다고 한다.
이때 돌함 속에 있는 유리통 하나가 금이 가서 유석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통을 기부하여 거기에 사리를 보관했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문헌상으로 볼 때 사리에 손을 댄 최초의 예로 보인다.
계단(戒壇)이란
계(戒)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로 석가모니 당시 누지보살(樓至菩薩)이 비구들의 수계의식을 집행할 것을 청하자
석가모니가 허락하여 기원정사의 동남쪽에 단(壇)을 세우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통도사 창건의 근본정신은 바로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에 있다.
통도사가 신라의 계율근본도량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 것이 곧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었다.
본래 통도사의 절터는 큰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자장율사는 이들 용을 교화하여 여덟 마리를 승천(昇天)하게 하고 그 연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쌓아 통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 금강계단은 그 안에 안치된 사리를 친견하고자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의 참배가 이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사리의 영험담과 함께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 이르러 왕실과 사신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사리를 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몽고의 황실에서도 금강계단을 참배하는 등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성(聖)스러운 장소로 여겨져 왔다.
고려 말에서 조신시대에 걸쳐 왜구들에 의한 사리 약탈기도가 여러 차례 자행되었는데
이때는 개성 송림사, 서울 흥천사, 금강산 등지로 옮겨 다니며 난을 피하는 등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승려들의 목숨을 건 노력이 이어졌다.
현존하는 금강계단은 창건 이후 수차례 걸쳐 중수되었기 때문에 창건 당시의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다만『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에 2층으로 위층가운데는 마치 가마솥을 엎어 놓은 것과 같다는 기록을 통해
그 형태가 현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계단의 모습은 2중 사각기단 위에 종 모양의 부도(浮屠)가 놓인 석조계단의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계단의 사방에는 불좌상(佛座像)을 비롯하여 천인상(天人像),
신장상(神將像) 등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중수 과정에서 새롭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금강계단 주변에는 층계의 소맷돌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있다.
(통도사 홈피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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