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음따라 발길따라...

영축산 통도사(울주군 삼남면 가천리-예비군사격장-에베로릿지-영축산 억새평원-영축산-통도사) 2013.11.3

 
파라칸사 나무열매
 
 
산부추
 
 
용담
 
 
 
 
 
 
 
 
 
 
 
 
 
 
 
 
 
 
 
 
영축산 에베로릿지
 
 
 
 
 
 
 
 
 
 
 
 
영축산 에베로릿지
 
 
 
 
 
 
 
 
 
 
 
 
 
 
 
 
 
 
 
가막살나무 열매
 
 
 
 
 
 
 
 
 
 
 
 
 
 
 
 
 
 
 
영축산 억새평원
 
 
 
 
 
 
영축산 고산습지
 
 
 
 
 
 
 
 
 
 
 
 
 
 
 
 
 
 
영축산
 
 
 
영축산에서 바라본 신불산
 
 
 
 
 
 
 
 
 
영축산靈鷲山(1081m)
백두대간의 매봉산에서 분기한 낙동정맥은
울진 통고산(1067m), 백암산(1003.7m)과 영천군 운주산(806.2m). 경주 단석산(827m)을 지나
울산 울주군의 가지산(1240m) 신불산(1208.9m) 영축산에서 크게 솟아오르는데...
 
영축산은 울산광역시 삼남면과 양산시 하북면 원동면에 걸쳐 있으며, 예로부터 영취산, 취서산, 축서산으로 불리우던 것을
영취산의 취(鷲)자의 한글표기 혼동을 바로잡기 위해 2001년 양산시 지명위원회가 열려...
 
불교에서 유래된 '취 또는 축'자를 '축'으로 표기 하는 근거는 1463년(세조9)에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법화경언해본'에서
축(鷲)자를 백성들이 접하기 쉬운 한자의 '취'로 표기되어 읽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어
이를 바로잡아 '취'를 '축'으로 표기해야한다는데 이견이 없었고
 
영축산은 석가모니가 화엄경을 설법한 고대 인도의 마다가국에 있는 산이름으로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통도사는 화엄경을 산림의 형식으로  취한 화엄도량이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금강계단이 있어
지명위원회 회의에서 통도사측의 의견에 따라 영축산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영축산에서 바라본 신불산
 
 
 
 
영축산에서 바라본 영축능선
 
영축능선은 영축산-함박등-채이등-죽바우등-오룡산으로 이어진다.
 
 
 
 
 
 
영축산 정상 풍경
 
영축산 정상에서 바라본 억새평원과 신불산
 
 
 
 
영축능선
 
 
 
 
영축산에서 바라본 울주군 삼남면 일대
 
 
 
 
 
 
 
 
 
산구절초
 
 
 
 
 
 
 
 
 
 
통도환타지아에서 바라본 영축산
 
용담
 
 
 
 
용담
 
 
영축산문(매표소)
 
 
 
 
 
 
 
 
통도사 부도밭
 
영축총림
 
통도사 단풍
 
 
 
 
 
영축산 통도사 일주문
 
 
 
 
 
 
 
 
통도사 천왕문
 
통도사 범종루
 
 
 
 

영산전

 

 
약사전
 
약사전은 극락전과 함께 공민왕 18년(1369) 성곡대사(星谷大師)가 초창하였으며 이후의 중건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
18세기초 극락전과 함께 중건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건물양식으로 보아 18세기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1칸으로 하여 주칸에 공포를 배치하지 않고
다포식이면서도 앞뒷면에만 공간포를 배치한 점이 특색이다.
따라서 측면에는 평방(平方)을 생략하고 있는데 그 기법도 다른 건물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처리라 할 수 있다.
 
  건물 내부에는 약사여래를 봉안하였으며,
현재 박물관으로 옮겨진 후불탱화(後佛幀畵)는 영조 51년(1775)에 그려진 것으로
약사여래와 함께 일광(日光), 월광(月光)보살을 위시하여 제대보살(諸大菩薩) 및 신장상(神將像)등을 함께 그렸다.
 
약사여래는 동방정유리세계(東方淨留璃世界)의 교주로서 과거 인행시(因行時)에 십이대원(十二大願)을 발(發)하여
이 세계 중생의 질병을 고치고 목숨을 연장케 하며,
일체의 재화를 소멸하고 의식(衣食)을 구족하게 하여 부처님의 원만행(圓滿行)을 닦아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하게 하는 부처님이다.
과거에 약왕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는 열두 가지 대원을 성취하였다.
즉 ‘약사십이대원(藥師十二大願)’의 공덕으로 성불하여 중생의 병고를 치료하므로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통도사 홈피에서 옮김) 
 
 
불이문
 
이 문은 동쪽 하로전(下爐殿)의 지반보다 약 1.5m가 높아지면서 축대를 내었고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다포식 팔작집으로 동향한 전면(前面) 3칸에 판문(板門)을 달아 출입하게 하였으며
대들보 위에 얹은 가구재가 다른 건물에 비해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내부는 매우 단조롭게 처리되어 종래 수법(手法)과는 달리 중앙의 대들보를 코끼리와 호랑이가 이마로써 받쳐 이고 있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 역시 코끼리와 호랑이가 건물의 하중(荷重)이마에 서로 의지해 있는 것이 바로 불이(不二)의 도리(道理)를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대들보위에 두터운 솟을 합장태를 삼각형으로 짜 그 부재 위에
장혀 (長舌)를 걸쳐 중도리(中道理), 하중도리(下重道理), 종도리(宗道理)를 얹어 서까래를 받도록 하였다.
이는 고식(古式)의 가구법(架構法)으로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이다.
 
불이문의 현판 글씨는 송(宋)나라 미불(米? : 號는 元章)의 필이다.
불이(不二)의 뜻은 법계의 실상(實相)이 여여평등(如如平等)하여 피차(彼此)의 차별이 없는 것을 ‘불이(不二)’라 하며
이 법계불이(法界不二)의 진리가 불법의 궤범(軌範)이므로 ‘불이법(不二法)’이라 하고
일체 성인이 모두 이 불이(不二)의 법위 의하여 진리에 취입(趣入)하므로 불이법문이라 한다.
따라서 여기서부터 청정한 불법도량의 중심부가 되며
불이(不二)의 진리로써 세속의 모든 번뇌를 벗어난다는 뜻에서 해탈문 이라고도 한다.
(통도사 홈피에서 옮김)
 
 
 
 
 
 
개산조당
 
개산조당은 용화전 옆 서쪽에 위치한다.
통도사의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을 봉안한 아담한 전각이다.
전각 정면에 개산조당이라는 현판이 붙은 솟을문은 해장보각의 조사문으로서
‘솟을삼문’형식이며 해장보궁(海藏寶宮)으로 통하는 문의 3칸 건물인데 중앙 칸이 양 측면 칸보다 높게 솟아 ‘솟을삼문’이라고도 한다.
3칸 모두 두 쪽의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건물형식은 조선시대 말기의 수법으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사당(祠堂)의 솟을삼문과 같다.
(통도사 홈피에서 옮김)
 
 
 
  대웅전(1644년) 국보 260호
 

통도사 대웅전은 상로전의 주건물(主建物)이다.

대웅전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규모로 되어 모두 15칸 건물이며,

특이한 것은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평면형이라 건물내부의 기둥배치가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이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중건하였지만 건물의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며,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아 통도사 대웅전은 참배의 기능만을 갖고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상을 모시지 않은 대신 불단 뒤편으로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금강계단이 위치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불당 내부에는 동서방향으로 길게 불단만이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設法床)이 있어 대덕승려가 설법할 때 사용한다.

통도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불전건물이다.

현재 국가 지정 국보 제290호로 보호받고 있다.

이 법당은 통도사의 중심건물로서 상로전의 주건물(主建物)이다.

대웅전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규모로 되어 모두 15칸 건물인데

특이한 것은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평면행이라 건물내부의 기둥배치가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이다.

전면 쪽에는 동향한 3칸 방향 평면의 건물이 있고 뒤쪽에는 남향의 3칸, 2칸 정방형 평면의 건물이 전면 쪽 건물에 붙어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기둥의 배치에서 곧바로 알 수 있으며 지붕모양을 보고서도 알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중건하였지만 건물의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기단의 형식을 보면 지대석(地代石), 면석(面石), 갑석(甲石) 등을 조립한 가구식(架構式) 기단이며

석계(石階)의 배치는 원래부터 현존의 건물과 같은 평면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계단의 위치를 보아도 평면이 합성(合成)형식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불당은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이 불당은 배전(拜殿)의 기능만을 갖고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불상을 모시지 않은 대신 불당 앞에 진신사리를 모셨다.

불당 내부에는 불쪽에 동서방향으로 길게 불단만이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設法床)이 있어 대덕승려가 설법할 때 사용한다.


건물 구조형식을 보면 공포는 다포식으로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칠포작(七包作)이다.

외부는 모두 쇠서 모양으로 되고 내부는 교두(翹頭)모양으로 되었다.

가구는 일고주(一高柱) 구량가(九樑架) 형식으로 하여 대량, 중종량, 종량이 지붕구조를 받도록 되었다.

천정(天井)은 우물천정인데 층급(層級)을 두어 중심부를 가장 높게 차지하였고 내부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통도사 홈피에서 옮김)

 

 
금강계단(金剛戒壇)
 

영축총림 통도사는 646년(신라 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

통도사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정골(頂骨)과 지절(指節), 치아사리(齒牙舍利), 금란가사(金?袈裟)가 봉안되어 있어

불지종가(佛之宗家)이자 국내에서 가장 큰 가람으로서 국지대찰(國之大刹)의 사격(寺格)을 지닌 사찰이라 할 수 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에 보면

원래 통도사가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아름다운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을 메운 후 그곳에 금강계단을 쌓고 통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창건주인 자장율사에 대한 기록인 『삼국유사(三國遺事)』 「자장정률(慈藏定律)」조의 기록에 의하면

스님이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佛舍利), 금란가사,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고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가람은 자장율사가 쌓은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몇 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고려시대인 1085년(고려 선종 2) 통도사의 경내임을 나타낸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세울 만큼 사세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1235년(고종 22)에 상장군(上將軍) 김리생(金利生)과 시랑(侍郞) 유석(庾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하던 차에 절에 와서 계단의 석종을 들어내고 석함 속의 사리를 예경했다고 한다.

이때 돌함 속에 있는 유리통 하나가 금이 가서 유석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통을 기부하여 거기에 사리를 보관했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문헌상으로 볼 때 사리에 손을 댄 최초의 예로 보인다.

 

계단(戒壇)이란

계(戒)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로 석가모니 당시 누지보살(樓至菩薩)이 비구들의 수계의식을 집행할 것을 청하자

석가모니가 허락하여 기원정사의 동남쪽에 단(壇)을 세우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통도사 창건의 근본정신은 바로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에 있다.

통도사가 신라의 계율근본도량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 것이 곧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었다.

본래 통도사의 절터는 큰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자장율사는 이들 용을 교화하여 여덟 마리를 승천(昇天)하게 하고 그 연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쌓아 통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 금강계단은 그 안에 안치된 사리를 친견하고자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의 참배가 이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사리의 영험담과 함께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 이르러 왕실과 사신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사리를 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몽고의 황실에서도 금강계단을 참배하는 등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성(聖)스러운 장소로 여겨져 왔다.

고려 말에서 조신시대에 걸쳐 왜구들에 의한 사리 약탈기도가 여러 차례 자행되었는데

이때는 개성 송림사, 서울 흥천사, 금강산 등지로 옮겨 다니며 난을 피하는 등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승려들의 목숨을 건 노력이 이어졌다.

현존하는 금강계단은 창건 이후 수차례 걸쳐 중수되었기 때문에 창건 당시의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다만『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에 2층으로 위층가운데는 마치 가마솥을 엎어 놓은 것과 같다는 기록을 통해

그 형태가 현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계단의 모습은 2중 사각기단 위에 종 모양의 부도(浮屠)가 놓인 석조계단의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계단의 사방에는 불좌상(佛座像)을 비롯하여 천인상(天人像),

신장상(神將像) 등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중수 과정에서 새롭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금강계단 주변에는 층계의 소맷돌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있다.

(통도사 홈피에서 옮김)

 

적멸보궁
 
산령각
 
 
 
 
 
통도사 단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