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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따라 발길따라...

통영 여행(충렬사-박경리 생가-세병관-동피랑 마을-유치환 문학관-남망산 조각공원)

 

 

 

 

 

 

 

명정(明井)

 

충렬사 방향의 신호를 기다리며 옆에 명정 입간판이 있어 따라가 보니 세개의 우물이 있습니다.

우물은 콘크리트로 근래에 다시 조성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우물에 낙엽이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우물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명정은 통영시 명정동에 있는 우물로 2개의 우물과 수조로 되어 있고

위에 있는 우물을 일정(日井) 아래에 있는 우물은 월정(月井)이라 부르며

둘을 합쳐 명(明)정이라고 부릅니다.

1670년 51대 통제사 김경이 설치하였다고 전하며, 위에 있는 일정은 충열사에서 사용하였고

아래우물 월정은 동네 주민들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충렬사 홍살문과 정문

 

통영 충렬사는 1606년 선조(39)년에 왕명을 받아 7대통제사 이운룡이 건립하였습니다.

이후 1663년 헌종은 '홍살문'과 '충렬사' 이름을 내려 사액되었으며,  1795년 정조가 충무공 전서를 발간하여 보관하게 하였고

정조 어제기판과 명나라 신종이 내린 8사품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1895년 통제영이 폐지 되면서 지방의 유지들이 충렬사보존회를 결성하였고

이후 재단법인 충렬사가 설립되어 매년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의 춘추향사와

충무공 탄생일인 4월 28일 탄신제를 전통제례로 봉행하고 있습니다.

 

 

홍살문(紅살門)은 서원 향교 능 묘 등의 정문에 나무 기둥을 세워 붉은 색을 칠하고 태극문양을 중앙에 넣어 설치하고

담장이나 문짝이 없어 출입을 제한하지 않으나

홍살문이 있는 곳에서 부터 방문객은 마음을 가다듬고 경건함을 갖춰야한다는 것을 표시하는 마음의 문이며,

정2품이상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만 세울 수 있는 문이랍니다.

 

 

충렬사 정문은 삼문구조인데

좌우측의 문은 출입문이고 가온데 문은 신문(神門)으로 제사날에 신을 맞아들이는 문입니다.

 

문정공 송준길이 쓴 사액편액

 

충렬사 정문 상량문

 

 

수령 300년의 동백나무

 

 

 

172대 통제사인 이승권(이순신장군 8세손)이 1840년에 세운

충렬사 강한루( 江漢樓)

 

충렬사 외삼문

 

충렬사 외삼문과 비각

 

충렬묘비(忠烈廟碑)

 

'通制使 忠武李公 忠烈祠廟碑名'으로 시작되는 충렬묘비는

1681년 광해군의 명을 받아 백사 이항복이 글을 짓고

남창 김현성이 글씨를 쓰고 선원 김상용이 전서했던 전라 좌수영 대첩비의 비문을

60대통제사 민섬(閔섬)이 잊어져가는 충무공의 충절을 기리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대첩비 원문을 옮겨와 충렬사에 건립하였는데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문곡 김수항이 전서했다고 합니다.

 

충렬묘비는 외삼문 오른쪽 첫번째에 위치해 있으며, 충무공의 후손들 중에 5명의 통제사를 배출하여

그분들의 묘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충렬사 경충재(충렬서원)

 

70대 통제사 최 숙이 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충의를 가르치기 위해 1695년에 세운 서원인데

대원군의 서원철폐에도 이순신 사당 가온데 유일하게 존속된 서원입니다.

 

충렬사 중문

 

 

 

 

충렬사 내삼문

 

정문부터 외삼문 중문을 거쳐 4번째 문인 내삼문으로 정당의 출입문입니다.

 

정당

 

정당은 민족의 수호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령에 제사올리고 공의 정신과 위훈을 만대(萬代)에 기리기 위하여

제7대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선조(宣祖: 제14대)의 명을 받아 세웠다.

이충무공 한분의 위패를 모시고 역대 통제사가 약 300년간 제사를 받들어 온 가장 신성한 장소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1606년에 창건하였는데

정당의 후원은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기와지붕의 용마루에 새긴 주역(周易) 팔괘(八卦)는 음양의 조화(造化)와 만물이 화생(化生)하는 역(易)의 원리를 담고 있으며

제의(祭儀)는 정통 유교의 법식을 고수한다.

 

1895년 통제영이 폐영되어 관급(官給)이 끊어지고,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년 한일병탄)를 당하여 제사를 받드는 주체가 없어지자,

이 곳 지방민들이 기미년 독립만세운동(1919)을 계기로 충렬사영구보존회(현 (재)통영충렬사의 전신)를 결성하여 제향의 맥을 이어왔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왜경이 장군의 위패를 칼로 부수고,

삼문의 태극문양에 덧칠하여 일장기(日章旗)로 바꾸고 또 제사를 올리지 못하도록 정당에 못질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을 필두로 송진우, 여운형, 신익희 등

많은 광복지사들이 환국 참배하여 건국의 결의를 다진 유서깊은 사당이며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이 국역편찬한 '이충무공전서'의 산실이기도 하다.


   정당을 향하여 중앙 좌측의 주련은 명나라 진린(陳璘:쳔린) 도독이

이충무공을 찬양한 어록의 한 구절인 「욕일보천지공(浴日補天之功:해를 씻어 빛나게 하고 하늘의 구멍을 메운 큰 공)」이며,

우측은 이충무공께서 임전결의(臨戰缺意)하신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 고종조의 명신이자 예서체의 대가인 신관호(申觀浩) 제187대통제사의 휘필이다.

 

 ☞ 주련 : 고대중국의 창조신화
     經天緯地之才 (경천위지지제) : 천지창조 때 혼돈된 천지를 씨줄, 날줄로 짜세운 능력.
     浴日補天之功 (욕일보천지공) : 하늘에 뚫린 구멍을 메우고 해를 씻어 빛을 낸 공적.

(충렬사 홈피에서 옮김)

 

 

충무공 영정(인물화의 대가 정형모 화백 작품)

 

충렬사 어제기판(御製記板)

 

정침 서쪽문 위에 걸려있다.

정조대왕께서 내려주신(1796년 : 정조19년) 사제문과 따로 하명받은 내용을

이득제(李得濟) 제147대통제사가 해서로 써서 목판에 오목새김하였다.


   글씨가 단정하고 웅혼하다.

가로 140cm, 세로 70cm 크기의 나무판에 테를 두르고 연화당초문을(蓮花唐草紋) 그려 단청을 하였다.

이충무공의 충효에 깊히 감탄하는 정조대왕의 감회와

이충무공 제향 받드는 일

그리고 이억기와 정운의 자손에게도 충무공전서를 한 질씩 전한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충렬사 홈피에서 옮김)

 

내삼문 안쪽에 걸려 있는 영모문(永慕門) 편액

 

 

충렬사 유물전시관

 

정조대왕 御制賜祭文

 

충렬사 팔사품

 

 

 

 

 

 

 

지자총통

 

현자총통

 

 

 

통영시 문화동 서문고개

 

 

 

박경리 선생 생가

 

 

통제영 망일루

 

 

망일루

 

 

 

통제영 지과문

 

 

통제영 세병관

 

국보 305호로 지정된 세병관은 '은하수를 끌어다 병기를 씻는다'는 의미로 평화를 추구하는 민족의 염원이 들어 있습니다.

6대 통제사 이경준이 충무공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1895년 통제영이 폐지될 때까지 300년 동안 충청 전라 경상도 수군의 객사로 사용되었습니다.

 

 

 

 

 

 

편액은 1780년(정조4년) 136대 통제사 서유대 작품

 

 

세병관 석축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돌벅수(石人:석장승)

 

돌벅수(석인)은 숙종 27년 류성추 통제사 때 액막이로 지과문 안쪽 세병관 뜰에 세웠답니다.

 

통제사 공덕비

 

 

 

 

통영시 향토 역사관

 

 

 

 

 

동피랑 벽화마을 안내도

 

 

 

 

 

 

 

 

 

 

 

 

 

 

 

 

 

 

 

 

 

 

 

 

 

 

 

 

 

 

 

 

 

 

 

 

 

 

 

 

통영 동포루

 

 

 

 

 

 

 

 

 

 

 

 

 

 

 

 

통영 청마 문학관

 

 

 

청마문학관

 

 

 

 

 

 

 

 

 

 

 

 

 

 

 

유치환 생가

 

 

 

 

 

 

통영항

 

 

남망산 조각공원

 

 

 

 

 

 

 

 

 

 

 

 

 

 

남망산 이순신 장군 동상

 

 

 

충무공 시비

 

남망산에서 바라본 통영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