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글

포도밭으로 오는 저녁 - 김선우

에드몽 2008. 8. 10.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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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도밭으로 오는 저녁 - 김선우
    포도밭에 갔습니다
    포도 철의 마지막 무렵이었습니다
    포도밭 할머니가 전지가위와 바구니를 내주며
    손수 담아오라 하였습니다
    바구니를 건네주는 손바닥에 못이 많았습니다
     


    십자가를 등짐 지고 야위어가는
    포도나무 못자국 난 손바닥을 들여다보다
    나는 자꾸 헛가위질을 하고......
    조심조심 걸어 들어온 포도밭 할머니가
    단번에 잘라내야 덜 아프다고
    가만히 일러주고 갔습니다

    낡은 플란넬 앞치마에서
    향유 냄새가 나는 듯하였습니다
    못이 많은 늙은 손이
    포도나무 발들을 쓰다듬고 갔습니다

    바구니 속은 동굴처럼 어둡고 깊어
    나는 자꾸 헛가위질을 하고......
    소스라치며 질겨진 포도나무 그늘로
    향유 단지를 들고 오는 저녁이 보였습니다

    포도나무가 흘린 피로 흥건하여진
    포도밭 이랑이 따스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