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글

해질녘 - 김선우

에드몽 2008. 9. 2. 21:21

 

 

해질녘 - 김선우



조루증을 앓나 잎 떨군 은행나무
흰 뼈 나부끼며 지느러미 쓰윽
노을 속을 미끄러져 헤엄쳐오는 사이

한 노인이 극장 간판 아래 서성이고 있습니다
고개 들어 여배우 젖꼭지를 지그시 물어봅니다
달큼한 입 속, 어린 시절 어머니가 물동이 이고 와
젖이 담긴 바가지를 그에게 내밉니다

부끄러워 어머니 귓볼에 분꽃귀고리 달아드립니다

웃을 때마다 딸그랑거리는 분꽃에서도 젖이 흘러나옵니다

꽃잎 감추며 새색시는 무명치마 말기에 새들을 풀어놓습니다
벌게진 얼굴의 그가 분첩을 내밉니다

아이들이 속곳 속에서 굴러나오며 새소리 연을 날립니다
노을 속을 지즐대며 날아가는 쪽빛 연, 연 위에서
맨발의 어머니가 앞섶을 풀며 그를 부릅니다

잎 떨군 은행나무 지느러미 즈려 타고
그 노인, 변두리 극장 안으로 헤엄쳐 들어갑니다
마지막 잎새 노을 속에 흠뻑 붉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