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미륵산, 통영항 2011.11.5
통영은 시인 김춘수, 소설가 박경리, 친일파 극작가인 유치진(이명박정부에서 문화부장관을 역임한 유인촌은 유치진의 아들), 청마 유치환등의 문인의 고향이고, 음악가 윤이상등을 배출한 예술의 고장입니다. 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거장 윤이상을 기리기 위한 통영국제음악제가 2002년부터 시작되어 매년 봄시즌과 가을시즌 2회에 걸쳐 성황리에 열리는데 올해로 10회를 맞고 있습니다.
걸출한 문인과 음악가를 배출한 고향답게 통영사람들은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한데 요즈음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북한 요덕수용소에 수용된 통영의 딸 ‘신숙자씨’ 송환과 관련된 이념문제로 둘로 나누어진 듯합니다. 통영에서 출생한 신숙자씨는 파독간호원으로 독일 유학생 오길남과 결혼하여 독일에서 살던 중 1985년 12월 남편을 따라 두딸과 함께 월북하였고, 1986년 오길남 혼자 탈북하는 바람에 신숙자씨와 두딸은 정치범 수용소인 요덕수용소에 수용되게 되었습니다.
오길남은 경북의성출신으로 서울대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브레멘대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적지 않은 나이(43세) 취업문제로 방황하고 있을 때 윤이상, 송두율에 의해 북한에서 경제학자로 일해 볼 의향이 있냐고 제의함에 따라 가족과 함께 월북하게 됩니다. 북한은 오길남에게 경제학자로 일할 기회를 주지 않고 세뇌교육 후 한국의 젊은 유학생부부를 월북시키라는 지령을 내렸고 신숙자는 한국 젊은이의 일생을 망친다며 적극 반대하며 독일에 가면 혼자서라도 탈출하라고 합니다. 북한의 지령에 따라 유럽에 온 오길남은 1986년 11월 덴마크 공항 입국심사대에서 구조요청을 하여 탈북에 성공합니다. 그는 독일에 머물며 가족의 송환을 위해 윤이상을 만나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자신의 힘으로 불가능 한 것을 알고 한국대사관에 자수를 합니다.
한편 통영의 모교회 목사 방수열씨가 북한정치범수용소 전시회를 하면서 북한의 인권상황을 고발하던 중 수용소에서 찍힌 신숙자 모녀의 사진이 통영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신숙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통영시민의 정서를 자극했고 방목사와 신숙자씨 학교동문을 중심으로 송환운동이 벌어지고, 아울러 신숙자씨 모녀가 월북하게 된 동기가 출신 음악가 윤이상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서 송환운동과 함께 경계인으로 살았던 윤이상이 비판받게 됩니다.
윤이상은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통영으로 이사와 학교를 다니던 중 어릴적부터 음악에 소질을 보였고 독학으로 서양고전음악을 배웠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상업학교를 다니던 중 오사카음악학원에서 작곡, 음악이론 등을 배우며, 일본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의 참담한 삶을 보면서 사회 정치적인 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후 일본의 작곡가에게 작곡을 배우던 중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의 참여하게 됨에 따라 귀국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2개월간 투옥되기도 했으며 석방 후 일제에 저항운동을 하며 피해 다니다 결핵을 얻어 경성제국대병원에서 입원 중에 해방을 맞이합니다.
광복 후 김춘수, 유치환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해 활동하면서 통영고등학교의 교가를 필두로 통영의 모든 학교의 교가를 작곡하였으며 한국전쟁 중에는 전시작곡가협회에서 활동을 하였고 휴전 후 서울대학교 등에서 음악을 가르치다가 음악을 깊이 있게 공부하기 위해 유럽으로 갑니다. 윤이상은 독일 베를린에서 보리스 블라허, 요세프 루퍼 작곡가를 스승으로 음악의 지평을 넓히면서 작곡에 몰두하여 교향곡 (예악)과 불교를 주제로 한 오라토리오(오 연꽃속의 진주여)등을 작곡하여 유럽음악계에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가 서독에 가족과 함께 정착하여 지내 던 중 1967년 7월 동백림사건이 터집니다. 동백림사건이란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서독교민과 재독 유학생 194명이 동독 북한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며 대남적화활동을 했다는 중앙정보부 발표 간첩단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이응로 화백과 작곡가 윤이상이 포함되었으며 이들은 정보부요원들에 의해 한국에 강제 소환되어 재판을 받게 됩니다. 이때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하던 중 유럽의 200여명의 음악가들이 대한민국정부에 탄원서를 내면서 2년 만에 석방된 뒤에 서독으로 추방 독일에 귀화하여 하노버 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치게 됩니다. 동백림사건 이후 윤이상은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위해 ‘님을 위한 교향시’를 작곡해주며 친분을 쌓는 등 대한민국체제부정활동을 하게 되고, 범민련 유럽본부의장을 지내며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고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듣고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를 발표합니다.
이때 오길남 신숙자부부의 월북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들이 월북을 결심하기 까지 작곡가 윤이상과 송두율의 영향이 있었으나 공작원에 의해 강제 월북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신숙자씨의 문제는 오길남의 잘못으로 발생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1986년대 남북의 경제력을 비교해도 한국이 북한보다 우위에 있었고, 한국은 노태우정부시절이었지만 군사독재의 그늘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의 꽃이 피기 시작한 시절이었는데 서울대를 나오고 독일에서 유학한 지식인이 가족을 동반하여 북한체제로 들어갔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네요.
통영의 딸을 송환하기 위한 통영의 일부시민과 전국의 보수단체들이 송환촉구 서명운동 및 집회를 하면서 작곡가 윤이상을 비판하는 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군사독재시대를 살면서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며 작곡가로써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였던 윤이상입니다. 1970~1980년대 파독광부로 구성된 한인회 및 독일유학생과 유럽의 재외 한인들은 분단된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 시절 한국은 군부독재정권으로 연일 민주화욕구가 팽배해져 있었고, 북한은 공산주의 체제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경제로 인해 북한주민의 생활상은 참담해 보이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남북한을 하나의 조국으로 생각하고 바라보는 경계인으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작곡가 윤이상은 친북활동을 하면서도 북한의 노동당입당권유를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2006년 1월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에서 동백림사건에 대하여 단순한 북한 접촉 동조행위를 국가보안법과 형법을 무리하게 적용하여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과장 확대했다면서 조사과정에 불법행위와 가혹행위로 인해 피해를 입은 당사자와 가족에게 국가가 사과하라고 권고한바 있습니다. 작곡가 윤이상의 친북활동은 이념으로 나누어진 한반도 상황을 고려하면 지탄받아야 마땅하지만 그가 이룩한 음악적인 업적은 평가받아야한다고 생각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