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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 릴케
(Rainer Maria Rilke, 1875~1926)
주여, 이제 때가 됐나이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던지시고
평원에 바람을 풀어놓으소서.
마지막 열매들을 가득 채우도록 명령하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따뜻한 남녘의 날들을 주시어,
무르익기를 재촉하시고 무거워지는 포도알에
마지막 달콤함을 넣어주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나중에도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혼자 살 것이며,
깨어나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나뭇잎이 흩날릴 때면 가로수 사이를
불안하게 배회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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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
<해설 - 최영미시인> 릴케가 생산한 대부분의 시들은 감상이 지나쳐,
소녀티를 벗은 뒤 나는 그의 시를 멀리했었다.
그러나 ‘가을날’만은 예외다. 여러 번 보고 또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변화를 ‘무거워지는 포도알’처럼
멋지게 표현할 시인이 또 있을까. 땡볕에 익어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포도다워지는 둥근 열매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가.
바람 부는 들판에서 시작되어 포도밭을 지나
이윽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시상의 전개도 입체적이다.
제3연의 시간적 배경은 대낮과 저녁을 지나 어느덧 밤.
홀로 타오르는 촛불처럼 고독한 인간은 집이 없다.
집을 지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다.
앞의 두 연에 비하면 상투적인 결말이지만,
가을날에 어울리는 밤이다.
[출전] Rainer Maria Rilke,
Sa··mtliche Werke 1, Insel Verlag, 1975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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