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밖에서 - 남진우
나는 아주 낡고 더러운 소문의 도시에 살았다 장마가 지나가면 태풍이 다가왔고 잠시의 맑은 날 끝엔 눈사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즐비한 술집 앞엔 매일 얼어 죽은 시체가 발견되곤 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일 년 내내 기침을 해댔고 검은 안개 속을 허우적거리듯 걸어다녔다 신문과 전파는 무심히 붐비는 사람 틈새로 빠져나갔고 거리의 검투사들은 찌르고 찔리며 환호 속에 죽어갔다
변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여전히 지루한 것들뿐 전쟁도 아니고 휴전도 아닌 막막한 세월을 유행 따라 머리 길이를 조절하며 사람들은 살아갔다 지급된 구두가 다 떨어져 나가는 순간까지
나는 아주 낡고 더러운 소문의 도시에 살았다 누추한 그림자를 끌고서 혀 밑에 쌓인 소금과 재를 맛보며 오래된 동상들이 늘어서 있는 황량한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이미 내 삶은 유적지를 적시는 메마른 빗방울이었고 아무도 내게 손 내밀지 않았으므로 길 잃은 소녀의 울음도 장님의 호각 소리도 내 깊은 적막을 깨뜨리지 못했다
나는 아주 먼 곳에서 온 자객처럼 하나씩 증발해버리는 소문의 도시에 살았다 아침이면 사나운 새들이 유리창을 부수고 날아들었고 저녁이면 어두운 카페에서 낯선 이국 가수의 목소리가 부우연 담배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밤 도시의 하늘을 가로질러 공습경보는 울려 퍼지고 추적자는 문을 두드리는데 방주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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