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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글

가을 손짓 - 도종환

 

 

가을손짓 - 도종환

 

 

책을 읽는데 빨간 산벚나무 잎 하나가 창에 와 툭 부딪치며 떨어집니다.
책장을 덮고 책을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몸을 오그린 채 하나씩 둘씩 낮은 곳으로 내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게

책 읽는 것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산개구리 일제히 울기 시작하더니 나뭇잎을 때리며 가을비가 내립니다.
지상까지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풀밭 위에 내리는 긴 빗줄기를 바라보는 동안은

라디오의 스위치를 오프쪽으로 돌립니다.

비가 긋는 아름다운 사선의 무리를 바라보는 것이

라디오를 듣는 일보다 좋습니다.


 


갈대가 은색의 희끗희끗한 머릿결을 흩날리며 곁에서 흔들릴 때는

한두 시간 전화기를 꺼 놓으면어떨까요.

저를 흔드는 것이 정말 조용한 제 울음인지 물으며,

갈대와 함께 있는 게 끝나지 않는 업무 이야기를

무선으로 계속해서 허공에 날리는 일보다 좋을 때가 있습니다.

 

 
풀벌레가 몸을 낮춘 민들레 잎 위에 앉아 울면서

아직 만나지 못한 제 반쪽을 찾는 소리가 밤늦게까지 들리거나,

소쩍새가 참나무 숲에서 울음소리를 툭툭 던지는 밤에는 쓰던 글을 멈춥니다.
내가 글을 쓰면서 모조리 꺼내는 바람에 텅텅 비어 버린 정신의 빈자리를

그 소리가 채우며 들어옵니다.
귀뚜라미 소리 소쩍새 소리는 가슴을 서늘하게 씻어 주고 머리와 귀를 맑게 열어 줍니다.


 


유월에 담은 매실 익는 향,

여름에 담은 산딸기 술 익는 냄새가 방안에 천천히 흘러나오면 잠시

컴퓨터를 꺼도 좋습니다.

그 술 몇 바가지 병에 담아 들고 이웃집으로 마실 나가는 밤에는

열이레 달이 오솔길에서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거실에 놓인 관엽식물의 살을 가만히 만져 봅니다.
매끄럽고 보드랍게 손끝에 닿는 느낌이 좋습니다.
수줍게 흔들리는 진분홍빛, 진보랏빛으로 곱게 물든 과꽃 꽃송이를

두 손가락으로 가만히 만져봅니다.

아슬아슬한 촉감이 전해져 오는 걸 느끼며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하고 낮게 읊조려 봅니다.

 


과꽃이 진하게 핀 가을 저녁에는

일을 멈추고 오 분 십 분만이라도 꽃옆에 있어 봅니다.
왠지 자꾸 그렇게 하고 싶어지는 가을입니다.

 

 

 

Notti senza Amore / Kate St 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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