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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따라 발길따라...

충무공 이순신장군 묘역 및 현충사 그리고 외암민속마을 탐방 2014.1.1

충무공 이순신장군 묘역 입구(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고룡산로 12-38)

 

이충무공 묘소 안내도

 

홍살문

 

연못

 

이충무공 묘 안내

 

 

이충무공 묘갈

 

증 효충장의적의협력 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령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 관상감사 덕풍부원군 행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겸 충청전라경상 삼도통제사

시 충무덕수이공순신 지묘

 

배 정경부인 상주방씨 부좌

 

 

 

정조대왕 어제신도비

 

정도대왕 어제신도비문

 

 

곡담이 둘러진 이충무공 묘소

 

봉분과 상석 사이에 혼유석이 있고 상석 좌우로 한쌍의 동자석,

상석 앞엔 장명등이 장명등 좌우로 문인석이 있고

석수상 한쌍이 마주보고 있습니다.

 

 

 

봉분과 상석 사이에 있는 돌이 혼유석입니다.

혼유석은 왕릉에서 주로 볼 수 있는데 왕의 제사는 정자각에서 이루어 지기 때문에

왕릉 봉분 바로 앞에 있는 상석은 혼유석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양반가에서도 혼유석을 놓는 경우가 있는데...

혼유석(魂遊石)에서 잠든 영혼이 나와 노닐게 하였답니다.

 

이충무공 묘갈

 

증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겸영

경연사덕풍부원군 행자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충청전라경상삼도수군통제사

시 충무이공순신지묘.

 

정경부인상주방씨 부좌

 

문인석

 

동자석

 

 

1598년 8월 17일 일관백 풍신수길이 사망하고 그의 유언에 따라 철군을 하기 위해 왜적들은 울산 부산 사천 순천등으로 집결합니다.

그러나 조.명연합군의 해상봉쇄로 바닷길이 막히자 왜군들은 명나라 장수에게 뇌물을 주고 뱃길을 열것을 요청하고

통제사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해상경비를 강화하였습니다.

그러자 왜군은 그들의 전선을 총동원하여 연합함대를 격파하고 철군을 하려고 1598년 11월 18일 저녁 노량에 집결하였는데 그 전선수가 500여척에 이릅니다.

이에 통제사는 왜교의 해상봉쇄를 해제하고 노량근해에 연합함대를 집결시켜 왜군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밤새 치열한 격전 끝에 왜적을 무찔렀으나 통제사는 11월 19일 아침 전투중에 왜군이 쏜 조총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공의 나이가 54세 입니다.

이에 통제사는 '지금은 전쟁이 한창이니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에 따라 통제사의 아들 회와 조카 완이 독전기를 흔들며 전투를 계속하여

정오경에 200여척을 격파하였습니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간신히 달아나고 50여척의 왜선들은 뿔뿔히 흩어져 도망가면서 7년간의 전쟁이 끝이 납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통제사는 경남 남해군 고현면 관음포에 올려져 남해 충렬사에 안치했고

다시 통제영 본영이 있던 고금도에 모셔졌으며

1599년 2월 11일 아산 금성산에 무덤을 만들었다가 광해 6년(1614)에 지금의 자리인 어라산 자락인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산 2-1 번지로 이장하였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신도비

 

충무공 이순신 신도비

 

이충무공의 신도비는 공의 묘소 입구 초입 왼쪽에 있는데

공의 외손 홍우기(洪宇紀)의 청으로 효종때 영의정 '김육'이 비문을 짓고, 당대의 명필이었던 판중추부사 '오준'이 글씨를 썻으며,

신도비는 현종 1년(1660)에 세워졌습니다.

 

충민공 이봉상 신도비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충무공 글씨

 

 

 

현충사 정려각

 

이충무공 집안에서 4명의 충신과 1명의 효자가 나와

그분들의 충의과 효를 기리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정려각 설치하였습니다.

 

이충무공과 강민공 이완, 충숙공 이홍무, 충민공 이봉상의 충신, 효자 이제빈 정려입니다.

 

효자 이제빈 정려

 

이충무공 정려

 

 

 

반송

 

현충사 본전 진입로의 소나무

 

 

홍살문

 

 

 

내삼문

 

 

 

 

현충사 본전

 

이순신장군 영정(장우성화백 작품)

 

이충무공 영정앞에 놓인 화환은 아산지역의 정치인들이 새해 아침에 헌화한 것입니다.

 

 

 

이충무공 생가

 

 

 

 

이충무공 후손들의 묘지

 

 

 

 

이충무공 세째아들 이면공 묘소

 

이충무공 장인 상주방씨 부사 방진공 묘소

 

이충무공 장인 부사 방진공 묘갈

 

 

 

충무정(우물)

 

현충사 구 본전

 

 

 

 

 

현충사 구 본전 편액(1707년 숙종 사액 현판)

 

 

조선수군의 화포

 

일본군의 조총

 

조선수군의 귀선 및 판옥선과 일본 수군의 전선

 

 

 

 

이충무공의 용모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장우성 화백작품)

 

 

이충무공의 부인 상주방씨에게 정경부인 시호를 내린 교지

 

 

이충무공 무과 급제교지

 

 

이충무공 장검(보물 제326-1호) 길이 197.5cm 무게 5.3kg

 

1594년  태귀련과 이무생이 제작했다.

 

이충무공 검명

 

三尺誓天(삼척서천) 석 자 되는 칼로 하늘에 명세하니

山河動色(산하동색) 산과 물이 떨고

一揮掃蕩(일휘소탕)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血染山河(혈염산하) 피가 산과 강을 물들이도다

 

이충무공 영의정 증직 교지(보물 1564호)

 

1793년 7월 정조대왕이(정조 17년) '충무공의 그 충성과 위무(威武)로써 죽은 뒤에

아직까지 영의정을 가증(加贈)하지 못한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라며

공을 최고위직인 '영의정'을 추증합니다.

 

1794년(정조18년) 정조대왕이 직접 신도비명을 짓고

글씨는 중국 안진경의 묘에서 집자(集子)하여 새기고, 전라도 관찰사 이형원에게 돌을 캐내게 해서 비석을 만들어

공의 묘소 아래에 신도비를 설치하였고

1795년 9월 정조대왕이 내탕금을 내려 실학자 유득공에게 이순신의 행적과 유고(遺稿)를 모아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토록 하였습니다.

 

1643년 인조임금이 이순신장군에게 충무공 시호를 내린 증시교지

 

 

선무공신교지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마을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있는 외암민속마을은

지금으로 부터 500여년 전엔 강씨와 목씨 진씨가 주로 거주하였는데

평택진씨 참봉 진한평 슬하에 딸이 셋이 있었고

예안이씨 이사종이 진한평의 첫째딸의 사위가 되어 마을에 내래와 살기 시작하며

그의 후손 중에  벼슬하고 '외암 이간'등의 성리학자를 배출 하면서 예안이씨 집성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외암마을이 조선시대 가옥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1988년 전통건축물 보존지역으로 지정되고

2000년 1월 7일 중요민속자료 제23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에, 기존의 건축물과 주변환경을 보존하고 복원하면서 2003년 7월 외암민속마을 보존회가 설립되어

앞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노력중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