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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따라 발길따라...

해남여행

나주곰탕 조식


나주읍성 망화루


나주관아 비석군


나주 금성관


두륜산 케이블카



양촌저수지와 한반도 지형









두륜산 케이블카 전망대와 해남읍 일원


고계봉에서 바라본 해남군 북일면 일대와 강진만

멀리 작년 여행 때 돌아 보았던 고금도와 신지도가 보이고...






고계봉에서 바라본 두륜산과 가련봉






두륜산 고계봉 인증 샷









녹우당 매표소









윤선도의 오우가


어부사시사


공재 윤두서 자화상(국보 240호)


미인도(보물 482호)


1982년 윤선도의 노비문서를 정리하다 발견했다는 작자 미상의 미인도

학계에서는 공재 윤두서의 후손의 작품으로 추정...

작품속의 여인은 기녀로 보이는데 1989년 도난당해 일본으로 반출되어 밀매되기 직전에 

범인이 잡혀 다시 돌아오는 수난을 격었다고...




녹우당 돌담길



녹우당 사당



해남 한정식


ㅎ~




두륜산 대흥사 해탈문


대흥사




대흥사 성보박물관


선조가 서산대사에게 하사한

금란가사와 발우


서산대사 유품


서산대사 교지


초의 선사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난 초의선사는 속성은 장(張)이며 이름은 (의순意恂).

15세에 나주 남평에 있는 운흥사로 출가하여 19세 때 대흥사의 완호스님을 스승으로 구족계를 받았으며

시詩, 서書, 화畵에 능했고

완도에 유배와있던 다산 정약용으로 부터 유학과 배웠으며

당대의 대문호인 김정희와 교류하며 학문의 지평을 넓히고

소치 허련에게 시와 그림을 전수하였고

소치를 김정희에게 소개하여 시와 서화를 배우게 하여 남종화를 꽃피우게 함.

 

39세 때 대흥사 뒷편에 일지암을 지어 다선일체(茶禪一體)를 실천하며

동다송과 다신전을 저술하여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명맥이 끊긴 한국의 차문화를 격조있게 정립하신 분으로

다성(茶聖)으로 추앙받고 있음.

 

초의선사는 55세에 1840년 헌종으로 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종사(大覺登階普濟尊者草衣大宗師) 시호를 받았으며

1866년 고종3년 81세에 입적.

 

표충사 호국문


서산대사의 속성은 최이며 이름은 여신으로 부모를 일찍여의고 안주목사 이사증의 양자로 들어가

12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무예와 학문을 익히고 15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지리산 청학동 화엄사동 칠불동을 떠돌다

노스님의 권유로 불교를 공부하다 뜻한 바 있어 머리를 깍고  1540년 일선화상의 스승으로 모시고 구족계를 받음.

 

이후 승과에 합격하여 양종판사를 하였으나 곧 사임하고 산문으로 들어갔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이르렀을 때 선조의 요청으로 전국의 사찰로 격문을 보내

의승군의 궐기를 호소하였고 대사는 순안에서 1,500명의 승군을 조직하여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됨.

선조가 팔도십육종도총섭에 임명하자 74세의 고령임을 들어 제자 사명대사에게 맡기고 묘향산에 들어갔으며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오자 승군을 이끌고 호위한 뒤 승군장을 유정에게 물려준 뒤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감.

 

선조는 대사에게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의 시호를 내리고

종2품 당상관에 임명함.


대사가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할 때 발우와 금란가사를 대흥사에 보관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

서산대사 유물관에 보관되어 있음.

 

서산대사는 선교양종판사를 지내면서 선교 양종으로 분열되어 있던 불교계를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라고 갈파하며

선교양종을 통합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음.


표충사 어서각

 

표충사는 서산대사가 입적한 후 185년이 지난 1788년(정조12년) 서산대사의 7세 법손인 계홍과 천묵이

조정에 상소를 올리니 선공감제조로 있던 호조판서 서유린이 정조대왕에게

"선묘(선조)가 내리신 전교와 의발이 호남 대둔사에 있으니 영남의 예(밀양표충사에 유정이 배향됨)에 따라 사당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시고

표충이란 편액을 내리는 것이 포장(褒獎 : 칭찬하여 장려하다)하는 뜻에 부합됩니다" 주청하니

정조대왕은 사당건립을 허락하고 '表忠祠'라 사액(賜額)을 내려

중앙에 휴정 좌측에 유정 우측에 처영뇌묵대사를 배향.



천불전


침계루


침계루는 계곡을 베개삼았다는 의미로 두륜산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에 있는 전각이며

대웅보전으로 들어가는 문임.



침계루(원교 이광사)


대흥사 대웅보전(원교 이광사 글씨)


조선시대 후기에 쌍벽을 이루는 서예가는 단연

동국진체를 완성환 원교 이광사와 추사체를 완성한 추사 김정희임.


둘은 동시대에 살지는 않았지만

김정희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폄하했는데 하나의 일화를 보면...

김정희가 제주로 유배를 가면서 일지암의 초의선사에게

'조송설(조맹부 : 원나라의 서예가)이 춤을 춥니다 그려...

촌스러운 대웅보전의 현판을 당장 떼어내세요. 내가 현판을 써줄테니..."

이광사의 글씨가 조맹부의 형식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혹평을 함.


초의선사는 아무말 없이 현판을 내리고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 현판을 걸음.


그 후 김정희는 8년간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대흥사 일지암에 들러 초의선사에게

"지난 번에 내린 원교의 현판이 있으면 다시 걸으세요"

추사 김정희는 제주에서 8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자아성찰을  통하여 더 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됨.


김정희의 무량수각


전라 병영성


병영성에서 바라본 진도대교



소용돌이 치는 울둘목


고뇌하는 이순신 상


대장선에서 진두지휘하는 이순신 장군


난중일기를 집필하는 이순신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