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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글

絶句(절구) - 崔沖(최충)

 


 

 

 

絶 句(절구) / 崔沖(최충)

 

 

 

滿庭月色無烟燭 : 휘영청 그득한 달빛 연기 없이 뜰 밝히니
만정월색무연촉


入坐山光不速賓 : 올망졸망 산 그림자 제 발로 찾아와 손님 되네
입좌산광부속빈


更有松絃彈譜外 : 솔바람 거문고 되어 자연의 소리 들려주니
갱유송현탄보외


只堪珍重未傳人 : 아, 이처럼 아늑한 기쁨 함께 할 이 그 누굴까?
지감진중미전인

 

 

 

 

               Promise / Secret Garden

 

    최충 (崔沖 984∼1068(성종 3∼문종 22))

     

    고려시대 문신·학자.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
    본관은 해주(海州). 1005년(목종 8)에 문과에 장원급제,
    1011년(현종 2)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1013년 국사수찬관을 겸하면서 태종에서 목종까지의 7대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정종 초에는 지공거(知貢擧)로서 과거를 주관하였고,
    1037년 참지정사(參知政事) 수국사(修國史)로 《현종실록》을 편찬하였다.
    1041년 판서북로병마사(判西北路兵馬事)로 나가 영원(寧遠)·평로(平虜) 등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1047년(문종 1)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서 율령서산(律令書算)을 정하여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050년 서북면도병마사를 겸하면서 동여진(東女眞)에 대비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1053년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이를 만류하는 조서와 훈작이 내려지고,

    1055년에는 내사령(內史令)이 되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사숙(私塾)인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열어 인재 양성에 힘썼다.
    구재학당의 학생은 시중(侍中)·최공도(崔公徒) 또는 최충도(崔沖徒)라 불렸다가,
    뒤에 시호를 따서 문헌공도(文憲公徒)라 칭하여졌다.
    문헌공도는 그때 성행하였던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의 하나로,
    한국 사립학교의 원조가 되었다.


    《고려사》 <열전>에 <동방학교의 일어남이 충에서 비롯되어 그를 해동공자라고 일컬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무신의 난 때 많은 시문들이 불태워져 지금은 시구 몇 절과
    원주 거돈사(居頓寺)의 원공국사승묘지탑비문(圓空國師勝妙之塔碑文) 및
    직산 홍경사(弘慶寺)의 갈기(碣記)가 남아 있을 뿐이다.


    정종의 묘정에 배향, 뒤에 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