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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따라 발길따라...

옥천 정지용시인 생가-육영수 생가-옥천군 군북면 추소리 부소담악 탐방 2013.6.8

정지용 시인 생가 안내판

 

 

 

 

엽서에 쓴 글 - 정 지 용


나비가 한마리 날러 들어온 양 하고
이 종이ㅅ장에 불빛을 돌려대 보시압.
제대로 한동안 파다거리 오리다.
--대수롭지도 않은 산목숨과도 같이.
그러나 당신의 열적은 오라범 하나가
먼데 가까운데 가운데 불을 헤이며 헤이며
찬비에 함추름 휘적시고 왔오.
--스럽지도 않은 이야기와도 같이.
누나, 검은 이밤이 다 희도록
참한 뮤-쓰처럼 쥬무시압.
해발 이천 피이트 산 봉우리 우에서
이제 바람이 나려 옵니다

 

정지용 시인 동상

 

1902년 5월 15일 정지용은 충북 옥천군 하계리에서 아버지 정태극과 어머니 정미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한약상을 하는 아버지 덕에 여유로운 생활을 했으나 홍수로 집과 재산을 잃어 어려운 시절을 보냈으며 지용의 아래로 두명의 동생이 있습니다.

지용(池龍)은 어머니가 연못에서 용이 하늘에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고 하여 지용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향수 시비

 

지용은 옥천공립보통학교(죽향초등학교)에 들어가고 12세에 동갑내기 송재숙과 결혼을 한뒤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박종화 홍사용 정백등과 사귀었고

박팔양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내기도 했으며

휘문학교 시절 교지(휘문) 창간호에 타고르 시를 9면이나 번역하여 실었고

신석우 등과 문우회(文友會)활동에 참가하여 이병기 이일 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등과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로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으나 박종화 홍사용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습니다.

 

 

1924년 일본 동경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여

유학생 잡지 (學潮)에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하였고 1929년 졸업 한 뒤 귀국하여

해방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며

김영랑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하였으며 1933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며

이상(李想)의 시를 소개하기도 하였으며,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함께 반 카프적 입장에서 순수문학의 옹호를 취지로 한 (9인회)를 만들었으며

일제강점기에 문인탄압과 회유에도 꺽이지 않는 민족시인이었으며...

1935년 첫 시집(정지용 시집)에 향수를 발표하였습니다.

 

1939년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며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으며,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 및 문과 과장이 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기입하여 전향강연을 하였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월북했다가 1953년 북한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안방

  

 

 

 

 

 

 

 

 

 

정지용 문학관

 

 

 

 

 

 

 

 

 

 

육영수 생가 안내

 

 

 

 

 

 

 

 

 

 

 

 종편 먹거리 파일에서 착한식당으로 선정된 할매묵집

 

 

 

추소리 부소담악에 핀 털중나리

 

털중나리

 

 

노루발풀

 

 

 

기린초

 

추소정에서 바라본 부소담악 병풍바위

 

 

부소담악의 왜가리

 

으아리

 

 

털중나리

 

 

털중나리

 

 

인동

 

산해박 약초

 

전망대에서 바라본 부소담악 병풍바위

 

2010년 5월에 고리산 하산 길에 촬영한 부소담악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