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작품해설 - 박주택> 김수영의 ‘봄밤’ 아시지요? 누군가 물었다. 나는 짐짓 굴욕을 이기려 눈을 둥글게 만들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는데 불온 문서를 뒤적거리는 스파이처럼 김수영 시집을 헤적거리며 거기에 '봄밤'이 없기만을 바랐다. 그랬는데 있었다. 헐렁한 셔츠에 퀭한 눈과 까칠한 수염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온몸으로 자유를 노래하며 말과 글에 말갈기를 달아 놓은 사내가 침울하게 앉아 있었다.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에 서둘지 마라,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당황하지 마라. ‘풀’을 노래하던 그 음성으로 헐렁하게 관절을 풀어 놓는다. 슬프거나 괴로울 때 ‘봄밤’을 읽자. 치열하게 현실 속을 파고들어가 육중한 세상을 들었다 놓았던 그였지 않는가.
'아름다운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풀꽃과 더불어 - 구상 (0) | 2008.05.14 |
---|---|
사랑의 변주곡 - 김수영 (0) | 2008.05.13 |
어머니 - 박경리 (0) | 2008.05.11 |
이런 사람 하나 만났으면 / 박완서 (0) | 2008.05.10 |
아침 - 박경리 (0) | 2008.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