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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글

사랑의 변주곡 -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 김수영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라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ㅡㅡㅡ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 · 19에서 배운 기술

최근 우리들은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은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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