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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따라 발길따라...

조령관(鳥嶺關) - 주흘산(主屹山) 부봉 - 조곡관(鳥谷關)

   

 

 

광복절 아침 기상청에서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고 예보를 하고 있었지만,

비가 많이 내리면 조령 부근 유적지를 살펴볼 요량으로 우산, 우비, 점심도시락을 챙겨 집을 나섰다.

조령은 초행길이다.

학교다닐때 지리시간에 지도책을 펴놓고 찾아보았던 것이 전부였고,

문경새재는 경상북도에서 충북으로 넘어가는 단순한 고갯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조령관에서 주흘관까지의 탐방여행을 해보니

조령은 선인들의 발자취가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었다.

 

이번산행에 참여한 민수산악회는

회장이 산악회를 운영하면서 회원들을 모아 산행을 전문으로 하며 회장이 직접운전을 하고 안내도 했다.

나는 처음 민수산악회와 함께 산행을 하게 되었는데 회장이 인상도 좋으시고 책임감도 남달랐다.

동호인모임이 아니라서 탑승인원들간에 유대감은 없어 처음 함께 하는 나로써는 다소 편안했다.

 

조령에 다다르니 산악회 회장이 등산지도를 배부하고, 등산코스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주흘산은 산세가 험하고 산행시간이 길어 초행산악인들이 완주하기 힘드니까 테마여행을 하라고 주문하셨다.

A코스는 주흘산 부봉부터 영봉에 이르는 완주팀이고

B코스는 주흘산 부봉(제6봉)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팀이다

나머지는 테마여행으로 조령관부터 조령관까지 가면서 역사유적지를 탐방하고 KBS 사극촬영지를 관람하기로 했다.

우리는 B코스를 택했다.

 

조령은 조선시대에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오가던 고개였고, 한양을 지키는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올라갈때 추풍령으로 가면 추풍낙엽떨어지듯 낙방할 것 같고

죽령고개를 넘으면 과거에 미끄러질 것 같으니 조령길을 택했단다.

 

조령관을 넘으니 옛 과거 보러 한양갈 때 선비들이 오가던 길도 있고

그분들이 오가며 지은 싯귀들이 돌에 새겨져 있어 조령을 넘나들던 선비와 민초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KBS에서 대하사극을 촬영하는 세트장이 있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어서 인지 많은 관광객들이

비가 오락가락하는데도 찾아오셨다.

요즈음 방영하는 대왕세종도 이곳 세트장에서 촬영되고 있단다.

 

여담소님, 쿠링님, 에드몽은 조령관에서 사진찍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느라 뒤쳐졌다.

아래로 내려오려니 빗방울이 굵어져 산행을 하느냐 아님 역사탐방을 하느냐하는 고민에 빠졌다.

이곳까지 왔으니 산행을 아니하고 돌아가면 아쉬움이 남을 것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소담님께서 B코스산행을 하기로 결정해주셨다.

빗줄기도 잦아들고 우린 잠시 비를 피해 간식을 들고 주흘산으로 향했다.

 

 

 

 

 

 

이번 테마 산행을 함께 하신 쿠링님과 충북에서 조령을 넘어가면서...

 

 

 

민수산악회에 함께 탑승한 분들과 조령을 넘어가며 기념촬영을 했다.

이분들은 주흘산산행을 하지않고 조령관에서 주흘관까지의 유적지탐방을 하신단다.

 

 

조령관을 넘기전에 충북에서 조령관을 바라보고 소담님, 쿠링님과...

 

 

조령을 넘어 경북에서 조령관을 바라본 모습. 嶺南第三關(영남제3관)의 현판이 있다.

조령관은 조선숙종때 조령산성을 쌓았으나 전란으로 육축만 남으채 소실된 것을

1976년 복원되어 사적 14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조령관을 배경으로 한컷... 에드몽ㅎ

 

 

 

정희량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1492년(성종 23)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했으나,

성종이 죽자 태학생(太學生)·재지유생(在地儒生)과 더불어 올린 소가 문제되어 해주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예문관검열이 되고, 승문원의 권지부정자에 임용되었다.

이듬해 김전(金詮신용개(申用漑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될 정도로

문명이 있었다.

1497년 예문관대교에 보직되어 ① 임금이 마음을 바로잡아 경연(經筵)에 근면할 것,

② 간언을 받아들일 것, ③ 현사(賢邪)를 분별할 것,

④ 대신을 경대(敬待)하며, 환관을 억제할 것, ⑤ 학교를 숭상하며 이단을 물리칠 것,

⑥ 상벌을 공정히 하고 재용(財用)을 절제할 것 등의 소를 올린 바 있다.

다음해 선무랑·행예문관봉교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무오사화 때는 사초문제(史草問題)로 윤필상(尹弼商) 등에 의해 신용개·김전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았는데,

난언(亂言)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장(杖) 100, 유(流) 3, 000리의 처벌을 받고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1500년 5월 김해로 이배되었다.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나 직첩을 돌려 받았으나 대간^홍문관직에는 서용될 수 없게 되었다.

그 해 어머니가 죽자 고양에서 수분(守墳)하다가, 산책을 나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총민박학(聰敏博學)하고 문예에 조예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음양학(陰陽學)에도 밝았으며,

영달에는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저서로 ≪허암집≫이 있다.

 

 

*춘일서회(春日書懷 : 봄날 회포를 적다)-정희량(鄭希良)*

莎草尙含凍(사초상함동) : 잔디에는 아직 냉기 서려있는데
春風吹欲生(춘풍취욕생) : 봄바람이 부니 다시 피어나려하는구나
輕陰連海暗(경음연해암) : 가벼운 구름 바다에 닿아 어둡고
薄日漏雲明(박일누운명) : 엷은 햇빛 구름사이로 환히 비친다
遊子思親淚(유자사친루) : 떠도는 자식은 부모 생각에 눈물 흘리고
孤臣去國情(고신거국정) : 외로운 신하는 나라 떠난 걱정이 된다
感時仍獨嘆(감시잉독탄) : 시절 형편 느끼니 홀로 탄식되나니
愁緖政崢嶸(수서정쟁영) : 시름의 실마리가 진정 많기도 하다.

 

*신선로의 유래*

음양학에 밝은 정희량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살이를 하다가 석방되어 신원되었으나 장차 다시 화를 입을까 두려워

어머니가 죽자 시묘살이를 하던 중 산책을 나가 돌아오지 않고

명산대찰을 찾아 은신하면서 신선로 모양의 넓은 냄비를 가지고 다니면서

산채나 채소를 끓여 먹으면서 살다가 죽어서 신선이 되었다고 해서

그 냄비를 신선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새재를 지나는 길에 - 김종직

 

나랏님 부름받아 새재를 넘자니

봉우리 꼭대기에 겨울빛이 차갑구나

벼슬길로 돌아가는 부끄러운 이 마음

개울 바닥 뒹구는 마른잎 같아라

 대궐 안에 아부꾼들 멀어지면

조정엔 오가는 말 화락하리라.

근심과 걱정으로 십 년을 보냈건만.

날뛰는 금수무리 잡아내지 못하였네

 

                                                                                                    

김종직의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季昷)·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아버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숙자(叔滋)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김종직의 가문은 고려말 선산의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박홍신 가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숙자는 고려말·조선초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던 길재(吉再)의 제자로,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종직은 길재와 정몽주(鄭夢周)의 학통을 계승한 셈이다.
1446년(세종 28) 과거에 응시, 〈백룡부 白龍賦〉를 지어
김수온(金守溫)의 주목을 받았으나 낙방했다.
그뒤 형 종석(宗碩) 등과 함께 황악산(黃嶽山)
능여사(能如寺)에 가서 독서에 힘써 학문을 크게 성취했다.
1451년(문종 1) 울진현령 조계문(曺繼文)의 딸이며 종직의 문인인 조위(曺偉)의 누나와 결혼했다.

<조의제문>
1498년(연산군 4)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
〈조의제문 弔義帝文〉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졌다.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의 정치행태를 비판해왔던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이어져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이 죽음을 당하고
정여창·김굉필·이종준(李宗準) 등이 유배되는 등 일단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중종이 즉위한 뒤 죄가 풀리고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는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의 건의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登鳥嶺(등조령) 새재에 오르니 - 兪好仁(유호인)

 

凌晨登雪嶺(능신등설령)

이른 새벽 눈 덮인 새재에 오르니,

 

春意正濛濛(춘의정몽몽)

봄이 올 뜻이 어렴풋하게 느끼는 구나

 

北望君臣隔(북망군신격)

북으로 임금이 계신 서울은 멀기만 하고

 

南來母子同(남래모자동)

남으로 고향땅은 가까워 지네

 

蒼茫迷宿霧(창망미숙무)

아득하여라 넓은 들은 저녁안개에 서리어 있고

 

迢遞倚層空(초체의층공)

높은 봉우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 의지하네

 

更欲裁書札(경욕재서찰)

다시금 글을 담아 보내려 하니,

 

愁邊有塞翁(수변유새옹)

잘된일인지 잘못된일인지 알수 없어 근심이 되오.

 

-성종의 총애를 받았던 유호인은 노모를 모시기 위해

지방근무를 자청하여 고향으로 향하던 중 새재에 서서 임금이 계신

한양과 고향을 번갈아 보며 忠과 孝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복잡한 심경을 적은 詩다

이처럼 새재는 이별과 만남, 희망과 상심, 영광과 좌절의 경계였다-

 

유호인의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뇌계(溪). 아버지는 음(蔭)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봉상시부봉사(奉常寺副奉事)가 되었다.

1478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1480년 거창현감이 되었다.

이어 공조좌랑·검토관을 거쳐,

1487년 노사신(盧思愼) 등이 찬진한 〈동국여지승람〉 50권을 다시 정리해 53권으로 만드는 데 참여했다.

그뒤 홍문관교리로 있다가 1488년 의성현령으로 나갔으나,

백성의 괴로움은 돌보지 않고 시만 읊는다 하여 파면되었다.

1490년 〈유호인시고 兪好仁詩藁〉를 편찬했다.

1494년 장령을 거쳐 합천군수로 나갔다가 1개월도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시·문장·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3절(三節)로 불렸다. 특히 성종의 총애가 지극했는데,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외관직(外官職)을 청하여 나가게 되자 성종이 직접 시조를 읊어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저서로 〈임계유고〉가 있다. 장수 창계서원(蒼溪書院),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맨발로 역사탐방할 수 있도록 주흘관에서부터 조령관까지 6.5km를 부드러운 흙으로 조성했다.

 

 

조령은 영남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길로

추풍령을 넘어가면 추풍낙엽 떨어지듯 낙방할 것이라는 생각에 넘지 않았고,

죽령은 과거에서 미끄러질까봐 넘지 않고

조령을 넘어 한양으로 갔다고 한다.

조령이 한양에서 충주를 거쳐 대구, 동래방면이나 상주,

통영의 영남대로로 이어지던 시절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조령을 넘으면

남한강에서 한양으로 뱃길로 편하게 갈 수 있었다.

 

 

聞慶문경(들을문<聞> 경사경<慶>)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간 선비들의 등과했다는

경사스런 소식을

제일 먼저 듣는 곳이라 해서 문경이라 했다는 설이 있는 만큼,

밤낮으로 사서삼경을 외며 공부에 열공하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넘던 고개였고,

관직을 놓고 낙향하는 선비들이 허전함을 달래며 쉬어가던 고개였고,

장삿꾼들이 등짐지고 넘던 고개였으며, 정든님과 사랑과 이별이 교차되는 고개였다.

 

 

주흘산 부봉(제6봉)으로 가는 이정표...

 

 

 

옛 과거길을 지나 주흘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주흘산자락을 오를땐 빗방울이 뿌리고 천둥소리가 요란했다.  주흘산의 雲霧

 

 

 

암벽을 로프를 잡고 겨우 올라가 힘들게 올라온 소담님께 사진을 부탁했더니...

ㅎㅎㅎ 혼났다...ㅠ..

 

 

쿠링님과 암벽을 뒤로하고 포즈를 잡았는데 아래를 보니 현기증이 났다.

에드몽 겁먹은 표정좀 봐바...ㅎ

왜그러니 몽아!

 

 

모진 추위와 비바람, 가뭄, 척박한 땅에서 소나무는 잘자랐구나.

한민족의 기개를 닮은 당차고 멋진 모습으로...

 

 

그래, 소나무 네가 있어 행복하다.

 

 

주흘산 부봉에 이르기 전에 조령 관문 쪽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雲海(운해)였다.

빗방울과 천둥소리 요란한데도 고추잠자리는 우리머리위에서 맴돌고 있다

 

 

 

 

주흘산 부봉(6봉)이 운무에 덮여있다.

 

 

 

검은 비구름과 주흘산 모습이 마치 연기에 덥혀있는 있는 듯하다.

무서움이...ㅎ

 

 

 

 

 

 

마침내 오늘 오르고자 했던 주흘산 부봉에 섰다.

 

 

소담님이 여유를 찾으신 모양이다. 언제보아도 인자하신 부처님 상인데... 혼날라나?ㅎㅎㅎ

독실한 크리스찬이신데...

 

 

엉성한 등산로...

예전에 청와대 모 비서관이 겨울산행을 왔다가 실족해서 사망했다고 하던데...

등산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자연을 보호해야할 관청에서 민족의 나무인 소나무의 목을 조르다니...

그래서 네가 죽었구나...ㅠ.. 미안하다.소나무야~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안전 로프를 자생하는 소나무에 묶어 놓았다.

 

 

 

 

 

 

이로프가 생명줄이다. 로프를 잡고 뒷걸음쳐서 내려가야한다.

그아래는 절벽... 무서버~~~

 

  

 

주흘산 부봉에서 조곡관으로 내려오기 위해 엉성한 철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등산로에 자라고 있는 이름모를 버섯

 

 

주흘산 부봉아래에 있는 소나무가 멋지다고 쿠링님이 한컷찍자고 하는 바람에...

 

 

 

드디어 조곡관이다.

 

 

 

 

문경쪽에서 바라본 조곡관. 嶺南第二關(영남제2관)이라는 현판이 있다. 

선조 27년(1594) 조령에 제일 먼저 축조한 관문으로 鳥東門(조동문)이라 했는데 구한말 의병과 토벌대간의 싸움으로 소실된 것을

1975년 복원하면서 鳥谷關(조곡관)이라 개명했다.

 

 

ㅎㅎㅎ... 부끄.. 하지만 시원한 알탕이 빠지면 여름산행의 묘미가 사라진다.

물이 차가워서리... ㅎ

쿠링님이 알탕의 만족감에 푸욱 빠진듯 하다.ㅎㅎㅎ

 

 

 

경주 포석정의 모습처럼 물이 요리조리 돌아흐른다.

쿠링님! 술잔 내려오기 기다리슈~!ㅎ

 

사진촬영 여담소님 

 

  

Music by Asha Mevla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