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6일 07시 40분 희운각대피소에서 공룡능선으로
희운각대피소에 머물면서 아침을 들며 담소를 나누는 산객들이 부럽다.
우린 이처럼 바쁜데...
그들은 저처럼 여유로울까?
국립공원에서 운영하는 대피소에 묵어가며 설악의 품에 안겨 설악의 기를 받고자 했었으나
개인 산행을 하려면 뜻있는 산친구들의 일정을 맞추기 힘들다.
지난여름동안 많은 산을 오르면서 다리에 힘을 기르며
설악종주를 준비해왔기 때문에 무리없이 해내리라 여기고
좀 힘들지만 무박종주를 선택한 것이다.
대피소를 지날 때마다 여유있는 산객들의 모습이 좋아보이고
산을 즐기며 걷는 모습이 부러웠는데...
희운각대피소에서 20여분을 쉬고 떠날 수 밖에 없어 아쉽다.
산행종점에 버스가 시간에 맞춰 출발할 터이니
우리가 설악산에 머무는 시간을
충분히 즐겨야한다.
희운각 대피소에 공룡능선으로 가는 첫길은
산책길을 걷는 기분이다.
아래로 200여미터를 내려간 다음 공룡능선으로 오르는데
오름길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산길엔 며느리밥풀꽃도 보이고...ㅎ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돌단풍이 붉게 물들어가고...
공룡능선의 첫 번째 능선
신선대
며느리밥풀꽃
돌단풍
산오이풀
돌단풍
개쑥부쟁이
산부추
산오이풀
산구절초
대청봉과 중청봉
우리가 넘어야할 공룡능선을 배경으로...ㅎ
공룡의 등줄기에 솟아 있는 날카로운 등가시처럼
기암괴석 바위봉우리들이 줄을 서있다.
1,275봉과 나한봉...
그 뒤로 마등령과 세존봉이 보인다.
설악의 백두대간은
미시령에서 마등령을 지나
공룡능선의 최북단 나한봉(1,276m)을 시작으로 1,275봉 신선대로 공룡능선이 끝나고
희운각을 넘어 소청봉- 중청봉 - 대청봉 -한계령으로 이어진다.
1,275봉과 나한봉
범봉
울산바위와 천불동계곡
울산바위
범봉(왼쪽) 천화대(중앙)와 울산바위(천화대 뒷쪽)
범봉을 중심으로 능선의 기암괴석의 모습을 보고 하늘꽃이 폈다해서 天花臺(천화대)라한다.
범봉
개쑥부쟁이
바람꽃
바람꽃
공룡능선에서 바라본 대청봉 중청봉 소청봉
나한봉과 1,275봉
1,275봉
1,275봉
바람꽃
울산바위와 속초 그리고 동해바다
금강초롱
금강초롱
산구절초와 산부추
바위떡풀
대청봉 중청봉 소청봉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
개쑥부쟁이
나한봉
분취
산구절초
투구꽃
1,275봉
산부추
울산바위
마등령과 세존봉
나한봉에서 바라본 1,275봉
천화대와 범봉(가온데 능선)
뒷쪽 하늘과 맞닿아 있는 능선이 화채능선이다.
대청봉과 외설악으로 연결되어 있는 능선으로 뾰쪽한 봉오리가 화채봉이고
칠성봉과 접선봉 권금성으로 이어지며
권금성엔 케이블카가 있어 설악동으로 내려갈 수 있다.
앞쪽은 공룡능선의 1,275봉과 나한봉
권금성(뒷쪽) 천화대와 범봉
천화대는 기암괴석을 꽃으로 비유해
수많은 하늘꽃이 피고 있다하여 천화대라 했다한다.
뒤에 대청봉에서 이어진 화채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다.
기회가 되면
대청봉에서 화채능선으로 내려가 설악동으로 이어지는 산행을 해야겠다.
공룡능선에서 4시간을 머물고 있다.
약 5.1km 거리인데
공룡의 기암능선을 걷다보면
앞에 좀 봐라
옆에도 봐라
뒤에도 봐라...ㅎ
저마다 멋진 곳을 보라고 한다.ㅎ
대청봉과 중청봉 소청봉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뒷쪽)
공룡능선의 1,275봉(가온데)
대청봉과 서북능선...
세존봉을 담을 때 한무리의 하루살이가 날더니만
사진이 점박이가 되었다.ㅎ
마등령에서 세존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나한봉을 지나 마등령으로 가는길에 잠시 쉬어가는 산객들...
반바지 등산복을 입고 쉬고 있는 여자산객의 용기가 돋보인다.
마등령과 세존봉(오른쪽 뾰쪽바위)
미시령과 황철봉
마등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나한봉에서 마등령으로 내려오는 너덜길
투구꽃
권금성과 접선봉 그리고 칠성봉
세존봉(우측)과 권금성 접선봉과 칠성봉
뒤에 멀리 보이는 도시가 속초시와 동해바다
아래 계곡은 천불동계곡
권금성 접선봉과 칠성봉
권금성은...?
설악산성(雪嶽山城), 옹금산성(擁金山城), 토토성(土土城)
소재지: 강원 속초시 설악동
규 모: 둘레 약 3,500m
고려 때 축성된 산성.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에서 북쪽으로 뻗은 화채능선 정상부와
북쪽 산 끝을 에워싸고 있는 천연의 암벽 요새지이나 현재 성벽은 거의 허물어졌고 터만 남아 있다.
이 산성의 정확한 초축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낙산사기》에 고려 말 몽고가 침입했을 때
인근 주민들이 이곳에 성을 쌓고 피란했다고 설명하고 있음에서
그 이전부터 존속해오던 산성임을 알 수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권·김의 두 가지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곳에서 난리를 피하였으므로 권금성이라 하였다는 전설을 소개하고 있다.
성의 대부분은 자연암벽을 이용하고 일부는 할석으로 쌓았는데,
좌우로 작은 계곡을 이루며 물이 흐르므로 적에 대항하기에 알맞은 산성이었다.
그러나 너무 높은 위치여서 오르내리기에 큰 힘이 들었으므로
조선시대 이후로는 차츰 퇴락하여 이후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하였다.
(출처:웹사전)
마등령 백담사 갈림길에서 바라본 범봉쪽 천화대와 1,275봉
11:50분 백담사 마등령 갈림길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가져온 음식을 펴놓고 보니
희운각대피소에서 담아온 물이 공룡을 타면서 바닥날 지경이다.
밥에 물을 말아먹으면 좋은데...
산에 오르다보면 물이 문제다.
많이 가져오면 짐이 되고 적게 가져오면 고통이 뒤따른다.
여름산행 땐 땀을 많이 나기 때문에 수분공급을 적절히 해줘야하는데
평소보다 많이 가져왔다고 생각했는데
공룡능선을 넘는데 힘이 들었나보다.
반주로 솔방울 술을 한잔씩 나누고...ㅎ
다람쥐도 산객이 던져주는 음식으로 점심을 들고 있다.
이곳 다람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산객주위를 맴돌고 있다.
다람쥐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으면
땅콩을 한봉지를 베낭에 담아가서
던져주면 될듯...ㅎ
산선씀바귀
꽃을 보면 노랑선씀바귀 같아 보이는데
잎과 줄기를 보니 씀바귀같지 않고
노랑꽃이 이쁜데 이름을 모르겠다
천화대와 범봉(가온데 능선)
뒷쪽 하늘과 맞닿아 있는 능선이 화채능선이다.
대청봉과 외설악으로 연결되어 있는 능선으로 뾰쪽한 봉오리가 화채봉이고
칠성봉과 접선봉 권금성으로 이어지며
권금성엔 케이블카가 있어 설악동으로 내려갈 수 있다.
권금성(뒷쪽) 천화대와 범봉
천화대는 기암괴석을 꽃으로 비유해
수많은 하늘꽃이 피고 있다하여 천화대라 했다한다.
뒤에 대청봉에서 이어진 화채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다.
기회가 되면
대청봉에서 화채능선으로 내려가 설악동으로 이어지는 산행을 해야겠다.
12시 15분 산지기 님을 따라 백담사로 발길을 돌렸다.
20여리길...
산에 오를 때보다 하산할 때 조심해야한다.
무릎관절에 가해지는 충격이 크기 때문에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게 스틱을 적절하게 사용해야한다.
계단 아랫쪽에 2개의 스틱을 찍고
팔의 힘을 이용하여 스틱에 무게를 실어 사뿐이 내려오면
하산길이 편하다.
오세암 공양간엔
김으로 만든 주먹밥과 미역국 그리고 약간의 반찬이 놓여있다.
오세암으로 하산하는 산객들이 허기진 배를 채워 가라는 사찰측의 배려인 듯 싶다.
공양간엔 나무로 만든 긴식탁4~5개와 의자가 놓여있고
한켠에 불전함도 있었다.
몇몇의 산객이 그곳에 앉아 오세암에서 제공한 주먹밥으로 점심을 들고 있었다.
우리도 공양간에서 물병을 채우고
미역국을 한대접 퍼서 숱가락으로 떠 먹었더니 맛이 좋았다.
타는 듯한 목마름이 일 순간에 사라졌다.
사찰에서 길손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아마도 오세암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과 무관치 않으리라.
오세암에 얽힌 전설
왕성하던 고려 왕조도 점차 황혼을 맞고 있을 무렵이었다.
관료들은 관료들대로 썩어 있었고 지주들이나 선비들도 너무나 부패해 있었다.
나라에 올바른 기강이 없어 정치인들이 썩어있을 때에는 반드시 어느 한 귀퉁이에 변고가 일게 마련이었다.
지금의 충북 제천 부근에서 얼마 전부터 알 수 없는 괴질이 온 마을을 휩쓸더니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하나하나 앗아가고 있었다.
이때 설정스님은 30여 년 만에 고향을 찾는 길이었다.
그런데 고향이란 게 어머니의 품속마냥 따스하기는커녕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스님은 이상하다 싶어 어릴 적 살던 집을 찾았다.
논둑이며 밭가에 난 길을 찾아 접어들었다.
가을걷이를 하고 난 밭에는 옥수수 그루터기만 황량하게 남아 있었고 밭 여기저기에 겨울여물용으로
세워 놓은 옥수수짚 다발만이 낟가리로 서 있었다.
옥수수짚을 보며 설정스님은 어릴 적 생각이 나 빙그레 웃었다.
"어머니, 저도 크면 수염이 나나요?"
"왜, 벌써 어른이 되고 싶은 게냐?"
"예, 저도 얼른 커서 옥수수 수염 같은 수염을 턱에 달고 싶어요."
"원, 녀석두."
어릴 때 설정스님은 옥수수 수염을 따서 콧수염으로 붙이고 뛰놀던 일이 재미있었다.
어머니는 그때 환하게 웃으시곤 했다.
금방이라도 '오근아'하고 아들 이름을 부르며 쫓아나올 것 같은 고향집이었다.
그런데 인기척이 없었다.
"어머니, 제가 왔습니다. 설정이 왔습니다. 아니, 오근이가 왔습니다."
설정스님은 대문을 세차게 흔들었다.
대문 한 쪽에는 새 봉자가 큼지막하게 씌어 있었다.
"이건 새 봉 자라는 거란다. 새 봉."
"새 봉, 새 봉."
아버지는 곧잘 외워 대는 어린 아들이 대견하기만 했다.
문위에 여덟 팔 자로 '입춘대길 건양다경'이란 글씨를 비롯해 입춘부를 손수 써 붙이셨던 아버지는
꽤나 유식한 분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새 봉 자를 가리키면서 물으셨다.
"오근아, 이게 무슨 자라고 했더냐?"
"예, 새 조 자입니다."
자신 있게 대답했다가 아버지께 알밤 한 대를 맞은 기억이 새로웠다.
설정은 문을 열고 들어가 마루에 걸터앉았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마루밑과 봉당뜰 아래에 밀과 보리싹만이 푸르름을 과시하고 있었다.
스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관세음보살님은 어째서 이런 고향엘 가 보라고 하셨을까?'
설정스님은 3일 전 밤에 설악산 대청봉 아래 위치한 관음암에서 꿈꾼 일을 생각해 냈다.
"스님, 어서 일어나세요, 고향에 속히 다녀오십시오, 어서요."
"고향에는 왜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꼭 가야 합니까?"
설정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름등잔에 불을 붙였다. 꿈이었다.
너무나 선명한 꿈이었다.
오색구름을 타고 나타난 한 여인의 부름에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녀는 분명 관세음보살이었다.
관음암 법당에 모셔진 모습 그대로였다. 아직도 방안에는 향내가 그득했다.
"그런데 이처럼 황폐한 고향엘 관세음보살은 왜 가보라고 했을까?"
설정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아랫마을에 산다는 한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이 말했다.
"허허, 시주를 오신 모양인데, 아무래도 잘못 오셨소이다."
"아닙니다. 시주를 온 게 아니라, 제가 자란 옛집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이라니,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예, 이 마을은 얼마 전 괴질이 돌아 모조리 떼 죽음을 당하고 말았소,
다만 서너 살박이 어린애가 하나 살았을 뿐이외다. 허, 그것 참. 쯧쯧."
설정스님은 노인을 따라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거기서 아이를 만났다.
가족관계를 따져 보니 설정스님의 조카였다.
위로 큰형님이 계셨는데 늦게 취처하여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이 아이가 바로 그 아들이었다.
설정스님은 조카 아이를 업고 설악산 관음암으로 돌아왔다.
잘 키워 중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 속가로 내보내 가문의 대를 잇게 하려는 마음이었다.
설정스님은 그게 바로 부처님의 뜻이고 자기를 고향으로 보낸 관세음보살의 뜻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아주 야무졌고 또 영리했으며, 순진하였다.
산짐승이나 새들과 함께 얘기도 나누고 다람쥐나 원숭이들과도 잘 어울렸다.
스님이 산에 나무하러 갈 때는 말벗이 되어 주곤 했다. 아이는 잘 자랐다.
설정스님은 아이의 법명을 지어주었다. 선두라 했다.
'두'자는 어조사이고 그냥 '착한 아이'란 뜻이었다. 속가의 이름이 '선돌이'였는데, 그 이름을 따서
그대로 지은 것이었다.
선두는 어느새 다섯 살이 되었다.
스님을 따라 조석 예불에 참예하여 '반야심경'을 곧잘 외워 대곤 했다. 잔심부름도 너끈히 해 냈다.
스님이 밥을 짓노라면 부엌에 따라나와 부지깽이로 장작더미를 두들기며 목탁치는 흉내를 내면서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곤 했다. 스님이 대견해서 물었다.
"애, 선두야."
"예, 스님."
"관세음보살은 어떤 분이라 했지?"
"관세음보살은 어머니 같은 분이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그래, 잘했다. 어이구 우리 선두 영리하기도 하지."
선두는 맑은 눈망울을 굴리면서 삼촌인 설정스님에게 와락 안겼다.
스님은 선두에게서 전해져 오는 아련한 핏줄의 정을 느꼈다. 볼이 참으로 따스했다.
'무럭무럭 자라서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텐데.'
설정스님은 선두를 내려놓고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선두가 스님의 눈물을 보고 침울해져 물었다.
"스님, 울고 계세요?"
"아니다. 울긴 내가 왜?"
설정스님은 짐짓 환한 웃음을 지여 보였다. 그러나 마음속은 쓰리고 아팠다.
'불쌍한 녀석, 아버지 어머니 얼굴도 모르고...너무 외로운 녀석이야.'
그 해 초겨울이었다.
겨우살이 준비를 하던 설정스님은 양식이 떨어진 것을 보고 시주를 해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설악산 대청봉 아래서 겨울 양식이 떨어지면 찾아오는 신도도 없고 큰일이었다.
설정스님은 시주를 하러 가기 위해 신들메를 했다. 선두를 돌아봤다.
데리고 갈 수도 없었고 그냥 놔두고 가자니 그렇고, 적어도 닷새는 혼자 있어야 하는데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님은 선두를 앉혀 놓고 말했다.
"내가 양식을 구해 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닷새는 걸릴 듯싶구나. 그 동안 너 혼자 있을 수 있겠느냐?"
선두의 맑은 눈망울을 바라보던 스님은 차라리 말없이 그냥 다녀올 걸 그랬다는 후회도 했다.
그런데 선두는 오히려 의젓했다.
"네, 스님. 혼자가 아니고 관세음보살님하고 둘입니다."
설정스님은 깜짝 놀랐다. 선두의 대답에서 어떤 어른보다도 엄청난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랬구나. 관세음보살님이 계시는구나. 그럼, 관세음보살님하고 절 좀 지키고 있거라.
내 속히 다녀오마."
사립문을 나서던 설정스님은 선두를 돌아보며 다시 한번 다짐을 했다.
"어떤 경우라도 멀리 나가지는 말아라. 그리고 무서움이 일거든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불러야 한다."
선두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장 법당에 들어가 목탁을 치켜들며 스님에게 내보였다.
설정스님이 산문 밖을 나서서 멀리 떨어졌을 때도 선두의 목탁 두드리는 소리는 아련히 들려오고 있었다.
설정스님은 걸음을 재촉하여 해질녘에 양양에 도착하였다. 양식은 넉넉히 구했다.
산으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어닥쳤다.
어린 선두 생각 때문에 급히 떠나려는 스님은 마을 사람들은 한사코 말렸다.
이 눈보라치는 밤에 어떻게 가겠느냐는 것이었다.
설정스님은 그렇게 해서 하룻밤을 양양에서 묵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밤새 눈이 내려 지붕처마 밑까지 쌓여 있었다.
양양도 그러한데 설악산은 엄청날 것이 분명했다.
눈이 왔다 하면 설악산은 열 자 스무 자씩 쌓이는게 보통이었다.
하는 수 없이 설정스님은 그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
그 해 겨울 따라 유난히 추위가 심해서 좀체로 눈이 녹지 않았다. 겨울눈이 원망스러웠다.
이듬해 봄이 왔다.
그 동안 몇 번이고 길을 떠났다가는 실신해 쓰러져 있는 설정스님을 사람들이 발견해 대처로 데려오곤 했었다.
여러 번의 사고로 인해 몸은 쇠약할 대로 쇠약해졌다.
그러나 이젠 봄이었다. 그는 동네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설악산을 향했다.
대청봉에 오르니 저 아래 골짜기에 관음암이 오롯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설정스님은 바람소리에 실려 오는 목탁소리를 들었다. 선두의 목탁소리라는 직감으로 알아챘다.
그러나 그는 믿지 않았다.
양식도 떨어진 데다 어린것이 몇 달 동안 살아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설정스님은 미친 듯이 선두를 부르면서 달려 내려갔다.
단숨에 임자에 이른 스님은 법당 밖에서 숨을 돌렸다.
법당 안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는 어린 선두의 소리가 목탁소리에 겹쳐 들려 왔다.
그때였다.
웬 젊은 여인이 오색 치맛자락을 끌며 법당을 나오더니 아름다운 채색구름을 타고 멀리 날아가 버렸다.
스님은 두근거린는 가슴을 부여안고 법당문을 조용히 열었다.
"선두야."
"스님."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싸안았다.
"스님."
"아이구, 네가 살아 있었구나."
"아니, 그럼 제가 살아 있지요. 스님이 오시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그래, 별다른 일은 없었느냐?"
"예, 스님 말씀대로 관세음보살을 불렀더니 관세음보살이 오셔서 같이 놀아 주고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했어요.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하고 너무나 똑같은 분이었어요."
설정스님은 너무나도 감격하여 선두를 끌어안고 한없이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그 날로 다섯 살 난 선두의 인연을 바탕으로 절 이름을 '오세암'이라 고쳤다.
그 후 오세암은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쳤으나 6.25때 전소하고
지금은 방 한 칸이 이 전설과 함께 전해지고 있다.
(출처:웹)
오세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에 속한 백담사의 부속암자이다
643년(선덕여왕 12)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여 관음암(觀音庵)이라고 했다.
1548년(명종 3)에는 보우선사(普雨禪師)가 중건했다.
1643년(인조 21)에는 설정(雪淨)대사가 중건했는데,
그에 얽힌 다음과 같은 관음설화가 전한다.
1888년(고종 25)에 백하화상(白下和尙)이 중건했다.
현존 당우로는 법당·승방·객사·산신각 등이 있고, 근처에 석물들이 남아 있다.
이 암자는 설악산에 있는 암자 가운데 제일 아늑하며
김시습·보우선사·한용운 등이 거쳐간 곳으로도 유명하다.
(출처:웹사전)
오세암은 뒷쪽으로는 관음봉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오른쪽엔 만경대가 내려보고 있어
산중턱에 있지만 아늑하고
건물이 남쪽을 향하고 있어 온화해 보인다.
오세암 뜰에 핀 벌개미취
오세암은
정채봉이 지은 동화로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고
kbs에서 tv문학관으로 방영되었는데...
오래전 기억이라서 기억이 가물가물 했었는데 오세암을 다녀오고 나서
다시 감동속으로 빠져든다.
눈빛승마
오세암을 찾는 신도들이 30여명이 우리를 비켜갔다.
대구에서 오셨다는 할머니는 앞서간 일행을 따라가기 힘들어
산길 계단에 앉아 김밥을 드시고 계셨다.
오세암은 관음기도도량이다
신도들 사이에서 영험있다 알려져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단다.
1865(고종2년)남호스님께서 해인사 팔만대장경 2질을 인출하여 한질은 오대산 상원사에
한질은 오세암에 봉안하였고
1898년 인공스님의 주도로
만일염불회도량이 되어 18년동안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다.
김밥드시며 허기를 달래시는 할머니는
어떤 염원을 가지고 오세암을 찾았을까?
점심 때
영시암에서는 산객들에게 국수를 제공한댄다.
영시암의 다람쥐도 사람들과 친하다.
땅콩을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다람쥐가 달려와 가져간다.
永矢庵(영시암)
영시암은 6.25때 소실된 불사(佛事)가 한창이다.
백담사 주지로 있던 설봉스님이 삼연스님의 후손인 서예가 一中 김충현 선생과 如初 김응현 선생의 도움을 받아
1992년부터 당우를 짓고 있다.
영시암의 주인인 삼연스님의 본관이 안동이고 속명은 김창흡으로 증조부는 김상헌이고 부친은 김수항이다.
김창흡의 형제들은 그의 조상 못지 않은 이름을 떨쳤다.
첫째 김창집은 숙종때 영의정을 지냈고, 김창협은 대제학을 지냈으며
김창흡과 김창업은 당대에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1689년(숙종15년) 장희빈 소생이 세자책봉문제(기사환국)를 반대하여 서인인 송시열이 사사되고
아버지 김수항이 파직 유배死賜되자 1705년 백담사에 들어온 후 4년뒤
내설악 깊은 곳에 정사를 짓고 은거하게 된다.
처음에는 삼연정사라고 부르다가 훗날 永矢庵(영시암)으로 명명하였는데 1711년 食婢(식비)가 범에 물려 죽자
거처를 화천군으로 옮겼다고 한다.
삼연이 남긴 영시암시에는 부친이 죽고 난뒤 영시암에 와서 생활하게 된 심경을 적고 있다.
삼연의 영시암 詩
내 삶은 괴로워 즐거움이 없고
세상 모든 일이 견디기 어려워라
늙어 설악 산중에 들어와
여기 영시암을 지었네.
<출전:인제군지>
설악산을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은 매월당 김시습과 삼연 김창흡이다.
삼연의 학문을 흠모해 많은 선비들이 영시암에 머물다가
설악산을 바깥세상에 전하면서
전국의 선비들이 휴양하러 혹은 설악산의 기를 받으러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노산 이은상선생이 1933년에 쓴 기행문 '설악행각' 을 보면 영시암에서 삼연의 유적비 보고 소회를 밝힌 글이 있지만
6.25전란으로 사라졌다.
조선 후기의 문신 김종후가 남긴 시문을 보면 대한 김시습과 삼연 김창흡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설악산에 대한 그들의 행적을 보여준다.
영시암에서 자고 오세암을 찾아 - 김종후
동봉(김시습)의 마음은 곧 선비 같고
삼연의 자취는 부처님일세.
훌륭하다. 이 산속에
천년을 한집에서 함께하세.
우뚝 솟아 엄숙하며 존엄한 천개의 봉우리요
요란한 소리로 달리고 격렬하게 흐르는 만 갈래 물일레
살 곳을 가려 여기 머물면
어찌 그 덕을 본받지 않으리오.
산수가 여운을 간직하듯
내가 지내왔던 일 어제와 같네.
판자 감상은 허술하게 만들었어도
기와 처마 아래 비석은 읽을 수 있네.
가까운 것을 사랑하고 먼 것을 잊으라니
누가 이 의문을 해설해주려나
수렴동 계곡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있는 계곡.
설악산국립공원 내설악의 백담사에서 수렴동대피소까지 약 8㎞에 이르는 계곡이다.
외설악의 천불동계곡과 쌍벽을 이루는 내설악의 대표적 계곡으로, 설악산에서 가장 깊고 빼어난 계곡이다.
백담사·영시암·영시암터·횡장폭포를 비롯해 백담산장·수렴동대피소 등이 계곡 내에 있다.
계곡의 남동쪽으로는 수렴동계곡의 곰골에 살던 곰이 잘못을 저지르고 불려가 뺨을 맞았다는 귀떼기청(1,578m)이 있고,
계곡의 바로 위로 올라가면 옥녀봉·오세암·만경대·오세폭포가 있다.
용대리의 외가평에서 백담사까지의 백담계곡을 지나
수렴동계곡·구곡담계곡·봉정암·소청봉·중청봉·대청봉에 이르는 약 21㎞의 등반로는
내설악의 가장 대표적인 등산 코스이다.
대청봉의 서쪽 골짜기를 이루는 구곡담계곡·가야동계곡·백운동계곡에서 흐르기 시작하는 물줄기가 모아져서
수렴동계곡과 백담계곡을 흘러 탕수동계곡을 지나온 물과 인제군 북면 한계리에서 합쳐져 북천이 된다.
금강산과 닮은 바위·골짜기·산봉우리의 이름을 설악산에 그대로 옮겨 붙인 경우가 많은데,
수렴동계곡이란 이름도 금강산의 계곡 이름을 빌린 경우이다.
(출처:웹사전)
영시암을 지나 이곳 맑은 물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우리 뒤에 처진 청산유수님과 파랑나루님과 합류하고
무거운 육신을 13시간동안 짊어지고 다녔던 무릎과 발목의 열기를 식히고
얼굴에 흐른 땀을 닦고 가려고...ㅎ
명경지수를 이를 두고 하는 말일게다.
물이 맑아 한길이나 될 법한 沼(소)가 바닥까지 드러나 보였다.
무릎까지 옷을 걷고 계류속으로 들어가니 뼈속까지 시원하다.
무릎관절과 발목관절을 위해 산행후에 냉찜질은 필수다.
물고기들은 돌틈으로 숨어버리고...
머리를 물에 담가 소금기를 씻어내니
산행피로가 풀리는 듯하다.
돌위에 앉아
초코렛을 씹으며 30여분을 기다리니
청산유수님과 파랑나루님이 내려왔다.
이분들도 수렴동 계곡에 발을담그고 휴식을 취하고 오느라
늦었댄다.
흰물봉선
영시암에서 백담사로 내려오는 길목에 자라는 금강송군락이 아름답다.
우거진 숲이라 다소 어두웠는데
붉은 빛을 띤 소나무가 어둠속에서 빛을 발하는 듯하다.
까실쑥부쟁이
꽃모양을 봐서는 참취 닮은 꼴인데...
이파리는 아닌 것 같고
꽃잎이 길고 숫자가 다소 많은 듯하여
섣불리 이름쓰기가 두렵다ㅎ
등골나물
등골나무엔 유난히 나비와 벌이 많이 찾아든다.
향은 별로 인데
아마도 꽃에 꿀이 많은 듯하다.
백담계곡은 돌이 흐르는 강이다.
설악산지역에 비가 내리면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때문에
물이 급격히 불어나 하천 바닥에 있는 흙과 모래는 씻겨나가고
바위와 자갈만 남아있다.
주변의 짙은 녹음의 숲과 계곡의 하얀 돌이
언바란스하지만
흐르는 물이 맑아 기분좋은 모습이다.
올해도 7월 장마 때 엄청난 물이 흘러 내려간 듯
백담계곡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있다.
아래서 올려다본 소나무
어른 여러사람이 안아야 품에 안을 수 있는 둘레와 커다란 가지가
소나무가 품은 세월의 흔적이 엿보인다.
백담사 일주문 앞에 청산유수님과 파랑나루님이 섰다
백담사를 코앞에 두고
백담사 찾아 헤메기도 햇던 웃지 못할 기억이...ㅎ
백담사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2리 설악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이 절의 기원은 647년(진덕여왕 1)에 자장(慈藏)이 창건한 한계사(寒溪寺)이다.
690년(신문왕 10)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했다.
785년(원성왕 1) 다시 불탄 것을 790년에
종연(宗演)·광학(廣學)·각조(覺照)·영희(靈熙)·법찰(法察)·설흡(雪洽) 등이
절터에서 30리 아래로 옮겨 운흥사(雲興寺)라고 했다.
984년(성종 3)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987년에 동훈(洞薰)·준희(俊熙) 등이 운흥사지의 북쪽 60리 되는 곳에 옮겨짓고
심원사(深源寺)라고 개칭했다.
1432년(세종 14)에 또다시 불이 나자
의준(儀俊)·해섬(海暹)·취웅(翠雄)·신열(愼悅) 등이 옮겨 짓고 선구사(旋龜寺)라 개칭했다.
1443년 화재로 소실되자
1447년 옛 터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절을 짓고 영취사(靈鷲寺)라고 했다.
1455년(세조 1)에 다시 화재로 불타버리자
재익(載益)·재화(載和)·신열 등이
옛 터의 상류 20리 되는 곳에 중건하고 백담사라고 개명했다.
1775년(영조 51)에 다시 불이 나자
최붕(最鵬)이 태현(太賢)·태수(太守)와 함께 중건하고,
심원사(尋源寺)라고 개칭했으나 1783년(정조 7)에 다시 백담사로 환원했다.
1915년에 일어난 화재로 거의 모든 당우가 타버린 것을 당시 주지였던 인공(印空)이 중건에 착수해
1921년에는 응향각 등 사무실 30여 칸을 새로이 짓고, 종과 북을 주조해 낙성법회를 열었다.
근대에 한용운이 머물면서 〈님의 침묵〉,
〈불교유신론 佛敎維新論〉을 집필하는 등 만해사상의 산실이 되었다.
6·25전쟁 때 불탄 것을 1957년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전(前)대통령 내외가 대(對) 국민사과성명 발표 후
이 절에 은거했다가 1990년 12월 30일에 연희동 사저로 돌아가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보전·칠성각·선원(禪院)·요사채 등이 있고,
남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관음전이 있다.
그밖에 자장의 유물로 전하는 아미타상과
소종(小鐘), 인조(仁祖)의 하사품인 옥탑(玉塔), 설담당(雪潭堂) 부도, 연포당(蓮浦堂) 부도 등이 있다.
(출처:웹사전)
님의 침묵 다실
이곳에서 차를 판매하는 듯
풍선으로 만들어 띄운 卍(만)를 중심으로 가온데가 대웅전
왼쪽 화엄당이
전두환대통령이 귀양와 살던 건물이다.
백담사에서도 탬플스테이 프로그램이 있나보다
고즈넉한 산사에서
울창한 숲과 물소리
바람소리가 정겨운 곳
스님들과 차를 마시고 참선도 하고
나는 누구인지 어느곳에 있는지 생각도 해보고
다도, 발우공양등
수도하는 스님들의 일상을 체험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산객들과 관광객들은
전두환 전대통령이 묵었던 화엄당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곳저곳을기웃거리며
기념촬영을 하고...
백담사 극락보전
난 기독교 세례신자인데...
이곳에서 부처님께 예를 올렸다.
에드몽가족과 군에간 아들놈이 무사히 군복무를 바라고
가슴속에 담긴 모든분들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하고
안전산행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백담사 약수터
이곳에서 빈 물병을 채우고...
물맛이 아주 좋았던ㅎ
백담사 대웅전 풍경
이곳에
에드몽의 그리운마음을 담아 풍경을 달고 왔는데...
가슴에 담은 모든 분들에게
에드몽이 전하는 그리움의 풍경소리 들리기를...ㅎ
만해기념관
시집 맨앞의 '군말'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만해 한용운-
백담계곡
백담계곡에 흐르는 강물이 소양강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들겠지...
16시 백담사 도착
13시간여의 산행이 마무리 되고...
백담사에서 용대리까지 약7km
산행에 지친 산객들이 걸어가기 힘든 거리다.
이곳까지 차량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니 백담사를 찾는 여행객들도
용대리 주민들이 운영하는 버스를 이용하지 않으면 어렵게 되어있다.
편도 20여리 버스요금이 2,000원이다.
승차요금이 너무 비싸다.
버스 8대가 쉬지 않고 산객과 여행객을 태워나르고 있다.
백담사는 만해한용운선생이 출가한 곳이고 "님의 침묵" 불교유신론을 집필하는 등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이지만
전두환대통령이 현대판 귀양살이를 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독립운동가 이자 시인인 한용운선생과
군부독재자이며 광주학살의 원흉인 전두환이 머물던 백담사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만
이 두사람으로 인해 백담사와 마을주민들이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백담사건너에 넓은 주차장을 만들어 용대리에 차를 세우지 말고
백담사까지 차량이 들어오도록 접근성이 좋게 해주든지
승차요금을 인하해야한다.
백담사와 설악산을 찾는 여행객이 봉이 아니기 때문이다.
용대리 민가근처에서 산악회에서 제공한 산행 뒷풀이를 했다.
돼지고기 수육과 막걸리...ㅎ
공룡능선, 봉정암, 서북능선, 자유산행한 사람들이
저마다 무용담을 늘어 놓으면서...
가슴에 품어왔던 설악종주를 무사히 마무리하니
가슴속이 풍요로워진다.
군복무시절 내설악 언저리에서 유격훈련과 전술훈련하며 고생했기에
강원도를 향해서는 오줌도 누지 않는다고 다짐하며
긴 세월을 설악을 잊고 지냈는데...
드뎌 설악을 품은 것이다.
설악산의 웅장한 기암괴석 고산준령이 가슴에 들어왔다.
앞으로도 설악이 거느린 지맥을 더 올라봐야할 듯 싶다.
이 행복 오래 간직하고 프다.
Oboe Concerto in C minor - Allegro
Domenico